'날라리 문체'로 정조에 맞선 이옥의 글과 삶

posted May 25,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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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라리 문체'로 정조에 맞선 이옥의 글과 삶>

 

 
 

(서울=연합뉴스) 신창용 기자 = "이옥은 쓰되, 절망하지는 않는다. 쓰되, 그걸로 무언가를 얻기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냥 쓴다. 반성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뒤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쓴다.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최고의 저항이었으므로!"(31쪽)

 

1970년생으로 글쓰기와 강의를 업으로 삼고 있다고 자신을 설명한 채운이 쓴 '글쓰기와 반시대성, 이옥을 읽는다'는 18세기 말 조선의 문장가 이옥(李鈺·1760∼1815)에 관한 책이다.

 

이옥은 저자가 설명하듯 연암 박지원, 정조, 다산 정약용 등 18세기를 찬란하게 빛낸 거성에 비하면 작고 초라한 별이다.

 

간혹 '문체반정(文體反正)의 희생자'로 혹은 조선 후기 '여성적 글쓰기'의 표본으로 이옥을 떠올리는 이도 있지만, 대개는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잊힌 자다.

 

이옥이라는 이름은 정조 16년(1792) 10월19일 조 조선왕조실록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정조가 순정한 정통 한문 문체에 천박한 소설 문체가 끼어드는 일을 막고자 문체반정을 시도하던 때였다.

 

한미한 서얼 집안 출신의 이옥은 칠전팔기 끝에 간신히 과거에 합격했으나 답안지에 새로운 문체인 소품체(小品體)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정조에게 속된 말로 '찍혀' 급제가 취소된 것도 모자라 유배지를 전전하게 된다.

 

그저 문장으로 풍속을 어지럽힌 죄목 정도니 반성문만 써내면 다 용서해줬으나 이옥은 끝끝내 반성문을 쓰지 않고 버텼다.

 

나아가 과거시험 응시 자격을 아예 박탈당한 것은 물론 군적에 편입돼 신분이 추락하는 수모를 겪는다. 하지만 그는 정조에게 빌지도,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지도, 또는 자기 글의 정당성을 따지지도 않았다.

 

"1792년 정조의 강고한 문체정책 소용돌이에 휘말린 후 1800년에 완전한 사면이 이뤄지고 나서야 이옥은 무사히 귀향할 수 있었다. 어느덧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이옥은 과거를 포기한 채 고향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자신이 쓸 수 있는 것을 썼다. 쓰는 것 외엔 출구가 없었을 것이다."(20쪽)

 

이옥은 거창한 글을 시도하지 않았고 당대 최고의 문장을 써내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쓸 뿐이었다. 북쪽 변방의 기녀가 한밤중 통곡한 사연에 대해, 옥심·향심처럼 '심'(心)자가 많이 들어가는 경상도 지방 여인들의 이름에 대해, 꿈틀거리는 벌레와 매미의 울음에 대해, 도둑들의 은어에서부터 집 앞마당의 잡초나 자신이 좋아하는 상추쌈과 날마다 다른 맛을 선사해주는 담배, 굽이치는 계곡물까지 자신이 쓰고 싶은 것을 자신의 스타일대로 썼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옥의 글 자체보다 이옥의 글쓰기가 드러내는 저항의 정신을 읽어낸다. 저자는 이옥을 통해 묻는다.

 

"너의 글을 쓸 것인가, 남의 글을 베낄 것인가. 이 질문이 함축하는 바는 이렇다. 자유로운 삶을 살 것인가, 사회가 파 놓은 홈을 따라 살 것인가. 이 질문은 또한 이렇게도 변형될 수 있다. 저항할 것인가, 복종할 것인가."(24쪽)

 

고전 텍스트를 가공한 책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재치있는 발상과 기발한 화법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북드라망. 312쪽. 1만6천원.

changyong@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2013/05/24 16:51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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