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국회회담의 추진 경과

posted Aug 12,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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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구 기자/스포츠닷컴]

 

 국회입법조사처 이승현 입법조사관은 국회보 8월호에 ‘남북국회회담의 추진 경과’에 관한 현황을 발표했다.

 

남북국회회담 제의의 적극성은 남북한 각자의 국력과 비례하는 함수관계를 보여 왔다.

즉 북한 스스로 자신들이 우위에 있다고 판단했을 때 공세적으로 제의 했으며, 남한도 북한보다 국력상 여유가 있다고 판단했을 때 적극적으로 남북국회회담을 제의했다.

따라서 2000년 이후에는 거의 남한이 주도적으로 회담을 제의해오고 있는 상황이다.

 

1985년 4월 9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이 ‘남북불가침공동선언’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국회연석회의를 제의함으로써 첫 번째 예비접촉의 계기를 만들었다.

 

이 제의에 대해 우리 측은 1985년 6월 3일 ‘통일헌법’제정 남북협의기구 구성문제 협의를 위한 남북국회회담을 제의하는 반응 보여 주었고, 이러한 제의를 주고받은 결과 예비접촉을 시작할 수 있었다.

 

1988년 7월 18일 우리 국회의장은 88서울올림픽에 북한 선수단 참가를 제의했고, 북한은 7월 21일, 26일 남북국회회담 연석회의를 제의했다.

 

양측은 준비접촉에 합의했는데, 그 배경으로는 첫째, 1987년 6월 항쟁 이후 남한 사회의 민주화, 둘째,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정책, 셋째, 1988년 총선에 따른 여소야대 정국을 들 수 있다.

북한은 정치공세를 강화하고 남한의 여소야대 정국을 활용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준비접촉에 응하게 된 것이다.

 

남북국회회담 준비접촉 시작 직후인 1988년 8월 29일, 남측은 평양에서 남북국회회담을 개최해 서울올림픽 사안을 논의하고 그 결과에 따라 북한이 서울올림픽에 참가할 것을 제의했다.

 

그렇다면 남북국회회담을 결렬로 이끈 쟁점들을 살펴보면, 첫째, 북측은 남북국회연석회의에서 남북한 대표 동수참여여하에 과반수가 찬성하면 채택하는 방식을 제안했으나 남측은 의결보다 심의기능을 강조했으며, 남북국회회담은 정부당국에 권고하는 역할로 제안하고자 했다.

 

둘째, 북한은 제6차 준비접촉에서 남북불가침선언에 외국군 철수문제를 조건으로 제시했다.

 

셋째, 북한은 1988년 12월 29일 제7차 준비접촉에서 ‘팀스피리트 훈련’을 강행하는 조건하에서 제8차 준비접촉을 예정대로 개최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넷째, 북한은 1989년 10월 25일 문익환, 임수경, 서경원에 대한 사법처리 반대 입장을 표명 했다.

다섯째, 또한 북한은 제9차 , 제10차 준비접촉에서 콘크리트 장벽 철거, 북남 당국 . 정당 수뇌급 협상제의 개최를 주장했다.

 

총 10회에 걸쳐 진행된 준비접촉과정에서 북한이 주장했고 합의에 이르지 못한 쟁점들은 미래의 남북국회회담 과정에서도 북한이 언제든지 제기할 가능성이 높은 사항들이다.

 

준비접촉이 결렬된 이후 여러 차례 제의가 오고갔지만 남북국회회담은 열리지 않은 채 많은 시간이 지나갔다.

최근의 남북 관계는 돌파구가 필요한 상황이며, 그 역할을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가 하는 것이 바람직하게 보인다.

 

특히, 남북국회회담의 물꼬를 트기 위해 국회의장이 북한을 사전 방문하는 것도 고려해 볼만한 대안이라 하겠다.

국회의 이러한 움직임은 대통령의 ‘하나된 한반도’를 만들겠다는 드레스덴 선언이나 통일 대박론과도 큰 흐름을 같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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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구기자 gu035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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