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출판 행복에너지, 중국에 ‘육영수의 사랑 그리고 또 사랑’ 판권 수출
도서출판 행복에너지(www.happybook.or.kr 대표이사 권선복)에서 출간된 책 ‘육영수의 사랑 그리고 또 사랑’이 중국에 판권을 수출하여 화제를 모으고 있다.
2012년 7월에 출간된 책 ‘육영수의 사랑 그리고 또 사랑’은 독자들에게 꾸준히 사랑을 받아온 스테디셀러다. 2년 만에 도서출판 행복에너지 최초로 판권을 해외에 수출하면서 그 진가를 드러냈다. 민족 출판사(民族出版社)를 통해 최초 5,000부를 출간하는 쾌거를 이룸으로써, 우리 국민들에게 영원한 퍼스트레이디로 추앙받는 육영수 여사의 이야기를 중국 본토에 생생하게 전하게 되었다.
책은 그 누구보다 자애롭고 지혜로웠던 육영수 여사의 극적이고 아름다웠던 삶을 추모하는 뜻에서 기록되었다. 대한민국 18대 대통령으로 국민행복시대를 추구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어머니인 육영수 여사의 탄생 일화에서 시작하여 박정희 대통령과의 만남과 사랑 등 그녀의 49년 생애를 기록하는 한편, 서거 이후의 정황 그리고 그녀의 흔적이 차후 한국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짚어본다. 또한 현재 우리들이 삶에 치여 잠시 잊고 있었던 소중한 가치들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를 갖게 한다.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이 역사의 질곡을 딛고 가파른 분수령을 넘어설 때, 육영수 여사는 역사의 제단 위에 던져진 한국의 어머니였다.”라는 평가를 기반으로 이 책을 엮어낸 동기와 목적이 여기에 있음을 밝힌 저자(문무일)의 말처럼 육영수 여사는 온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퍼스트레이디다. 살아생전 여사의 이름 앞에는 ‘국모’, ‘퍼스트레이디’, ‘한국의 어머니’, ‘청와대의 1인 야당’ 등의 무수히 많은 수식어가 붙었다. 어느 것 하나도 그 무게가 가볍지 않은 단어들이지만 이를 얻기까지 남다른 생각과 실천 그리고 숱한 노력과 관심이 있었다. 대한민국의 국민 모두는 그 노고를 잘 알고 감사함을 느꼈기에 그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아 여러 수식어들을 만들어 붙인 것이다.
저자 문무일은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을 졸업하고 문화방송(서울·부산 MBC) 아나운서로 재직하였으며 1977년부터 대한조선공사 공장 새마을 담당으로 활동했다. 1980년에 설립된 새마을운동중앙본부에 창설요원으로 활약했으며 1987년 초 도미한 후 워싱턴과 뉴욕에서 재미언론인으로 활약해 왔다. 도서출판 행복에너지에서 인생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철학을 담은 ‘길에서 길을 묻다’(2014년 2월)를 출간하여 김남조 시인과 김승옥 소설가에게 호평을 받은 작가이기도 하다.
또 다른 저자 이영호는 영남대학교를 졸업한 후 맹호부대 육군보병중위로 월남전에 참전, 대위로 전역(무공훈장, 대통령 표창)하여 내무부 공채 경찰학교를 졸업했으며, 이후 청와대에서 근무를 시작해 어린 시절의 박근혜 대통령의 경호 임무를 수행했다. 이를 바탕으로 책 ‘육영수의 사랑 그리고 또 사랑’의 실증과 현장감 제시에 무게와 깊이를 더해 주었다. 퍼스트레이디로서 보냈던 10년 9개월의 시간 내내, 언제나 따뜻한 가슴으로 가난한 나라를 그리고 그 가난한 나라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국민들을 생각했던 육영수 여사.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의 곁에서 항상 함께 울고 웃었던 우리들의 어머니를 ‘육영수의 사랑 그리고 또 사랑’의 판권 수출을 계기로 다시 한 번 그리워해 본다.
비운의 퍼스트레이디 육영수
잊혀지지 않는 대한민국 퍼스트레이디.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이 역사의 질곡을 딛고 가파른 분수령을 넘어설 때 역사의 제단 위에 던져진 한국의 어머니 육영수 여사. 이제 수천만의 가슴 속에 결코 잊히지 않을 사랑을 남기고 간 그녀의 아름다웠던 삶의 흔적을 다시 헤아려본다. 이 책 ‘비운의 퍼스트레이디 육영수의 사랑과 눈물’은 그 누구보다 자애롭고 지혜로웠던 육영수 여사의 극적이고 아름다웠던 삶을 추모하는 뜻에서 기록되었다. 육영수 여사의 탄생 일화에서 시작하여 그녀의 49년 생애를 기록하는 한편, 서거이후의 정황 그리고 그녀의 흔적이 차후 한국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짚어보며, 현재 우리들이 삶에 치여 잠시 잊고 있었던 소중한 가치들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를 갖게 한다.
살아생전 육영수 여사의 이름 앞에는 ‘국모’, ‘퍼스트레이디’, ‘한국의 어머니’, ‘청와대의 1인 야당’ 등의 무수히 많은 수식어가 따랐다. 어느 것 하나도 그 무게가 가볍지 않은 이름들이다. 하지만 이 이름들은 육영수 여사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 이름들을 얻기까지는 육영수 여사의 남 다른 생각과 실천, 그리고 숱한 노력과 관심이 있었다. 대한민국의 국민 모두는 그 노고를 잘 알고, 감사함을 느꼈기에 그에 대한 존경의 염을 담아 여러 수식어들을 만들어 붙인 것이다. 육영수 여사는 그렇게 얻은 새로운 이름과 존칭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았다.
퍼스트 레이디로써 보냈던 10년 9개월의 시간 내내, 언제나 따뜻한 가슴으로 가난한 나라를 그리고 그 가난한 나라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국민들을 생각했던 육영수 여사.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의 곁에서 항상 함께 울고 웃었던 우리들의 어머니를 이제 다시 회상해본다.
저자 문무일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을 졸업하고 문화방송(서울·부산 MBC) 아나운서로 재직하던 중, 1975년 새마을운동 취재기자로 전국 새마을 현장에 투신, 1977년부터 대한조선공사 공장 새마을 담당으로 활동했다. 1980년에 설립된 새마을운동중앙본부 창설요원으로 활약했으며, 1987년 초 도미한 후 워싱턴과 뉴욕에서 재미언론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목차>
프롤로그
책을 열면서 : 문무일
제1장 옥천, 푸르른 날에
교동집 작은 아씨
배화의 꽃봉오리
옥천여학교, 가사 선생님
6·25, 부산으로 피난을
제2장 사랑의 서약
박정희 중령의 아내
신혼살림의 어려움
혁명은 시작되고
제3장 퍼스트레이디가 되다
청와대의 야당
손수레와 미역국 그리고 국수
공인의 아내 ‘양지회’의 탄생
한 통의 편지
루르의 눈물바다
생활의 한 조각
제4장 어머니의 마음 아내의 마음
교육에 대한 열의
검소하고 서민적인 어머니
아내의 사랑 노래
제5장 그늘진 곳에 빛을
일하는 퍼스트레이디
진심을 다해
제6장 하늘의 눈물
하오 7시
군악대의 장송곡
제7장 잊지 못할 큰 사랑
나환자들의 비문
육영수 여사 추모글
묘소를 찾는 사람들
한센인의 편지
부 록 대통령의 사랑
참 고
<본문 미리보기>
육영수의 태몽은 집 마당의 맑은 연못에서 큼직한 자라가 나와 이경영의 품에 덥석 안기자, 엉겁결에 두 팔로 자라를 품에 안고 안방으로 들어온 것이라고 한다. 생명과 부귀의 상징인 자라가 품 안에 안기던 충만감과 함께 육영수가 잉태된 것이다.
육영수의 생가에는 다양한 꽃과 나무가 자랐다. 덕분에 육영수는 진흙 속에서 자라면서도 청결하고 고귀한 연꽃을 비롯해, 백년이 넘은 아름드리 은행나무와 감나무와 함께 소녀 시절을 보냈다. 생가의 연당 사랑채는 여름철 육영수의 가족들이 즐겨 찾던 장소였다. 연당에는 홍련백련이 자라고 있었으며, 주변 정원에는 온갖 꽃나무들이 가득했다. 겨울이 되면 육영수와 오빠 인수, 여동생 예수는 연당 사랑 연못에서 스케이트를 타기도 했다. - ‘제1장 옥천 푸르른 날에 - 교동집 작은 아씨, 19~20P’
남자들은 등에 짐을 지고, 여자들은 머리에 보따리를 인 채 부산으로의 피난 행렬을 이어갔다. 먹을 물도 없었고, 식기며 이부자리며 뭐 하나 멀쩡한 것이 없는 상황에서 피난민은 점점 모여들고 있었다. 육영수는 아버지가 알려준 대로 사촌 형부를 찾아갔다. 하지만 먼저온 피난민들로 인해 빈방이 없었다. 남은 가족이 부산에 닿기 전 방을 구해야 했건만, 빈방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도 없었다. 한없이 낯선 부산을 헤집고 다니며 몇 날 며칠을 고생하다 간신히 방 한 칸을 마련할 수 있었다. 부엌도 딸려있지 않은 비좁은 방이었지만, 좋고 그름을 가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부산으로 피난 온 지 열흘이 지나고 있었건만 옥천의 가족들이 당도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를 않았다. - ‘제1장 옥천 푸르른 날에 - 6·25 부산으로 피난을, 39P’
1974년 8월이었다. 필리핀의 로물로 장관이 서울대학교에서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 대통령은 로물로 장관을 위해 청와대에서 오찬을 베풀었다. 청와대로 향하던 로물로 장관이 이런 말을 했다. “박 대통령은 럭키맨이야.” 곁에 있는 사람들이 의아한 눈빛을 보내자, 로물로 장관은 이어 대답했다. “부인 육영수 여사를 두었기 때문이지. 조용히 뒤에서 남편을 뒷바라지 하는 모습을 보면 박 대통령은 정말 럭키맨이란 생각이 들어.” 며칠 뒤, 로물로 장관의 이야기가 전해졌다. “각하, 로물로 장관이 각하더러 럭키맨이라고 합니다.” “왜 내가 럭키맨이야.” “네. 육영수 여사 같은 영부인을 두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내 칭찬은 아니구먼.” - ‘제3장 퍼스트레이디가 되자 - 청와대의 야당, 91P’
육 여사는 세 자녀가 다니는 학교에서만큼은 절대로 ‘영부인’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것은 학교 선생님에 대한 존경의 의미이자, 자녀들의 교육에 대한 배려였다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모범적인 학부형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자연스레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고, 학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근혜는 어머니가 서예하던 모습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 ‘제4장 어머니의 마음 아내의 마음 - 교육에 대한 열의, 159P’
1970년 6월엔 한 사람의 비서와 함께 직접 나환자 마을을 찾았다. 경기도 양주군에 있는 성생농장과 천생원이 그곳이었다. 성생농장에 들어선 육 여사에게 나환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코는 뭉그러져서 제대로 된 형태가 아니었다. 손가락도 마디가 몇 개씩 떨어져 있었다.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간 것 같은 모습은 참혹했다. 하지만 그 사람들 사이에 보이는 아이들의 모습은 너무 해맑았다. 게다가 아이들의 얼굴이나 몸은 일반인과 다르지 않았다. 육 여사는 그곳을 둘러보고,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던 중 한 아이가 코를 흘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직 어린 이 아이는 엄마의 치마를 붙들고 있었다. “내가 코를 닦아줄까?” 육 여사는 아이 앞으로 다가간 뒤, 아이를 안아 올렸다. 그리고는 가방을 열어 손수건을 꺼내 아이의 코를 닦아 주었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나환자 마을 사람들은 크게 감동을 받았다. 아이의 어머니는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육 여사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리고는 진작 들렀어야 했는데, 너무 늦게 찾아와서 미안하다며 인사를 건넸다. 육 여사는 마을 사람들에게 인자한 미소를 띠며 인사를 한 뒤, 지도자의 손을 잡아 악수를 했다.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이어 육 여사는 곁에 있는 사람들의 손을 잡으며 상냥하게 물었다. “만나게 돼서 반갑습니다. 고생이 많으시죠? 아이는 몇이나 되세요? 농사는 잘되시나요?” - ‘제5장 그늘진 곳에 빛을 - 진심을 다해, 202~203P’
식순에 따라 경축식이 시작되었다. 먼저 국민의례가 있었고, 애국가 제창이 이어졌다. 그리고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마치자, 박 대통령의 경축사가 시작됐다. 박 대통령은 검은색과 흰색이 들어간 넥타이를 단정히 매고 있었다. 박 대통령 특유의 음성이 마이크를 타고 장내에 울려 퍼졌다. 2층 왼편에 자리한 보도진의 카메라가 조용히 돌아가고 있었다. 박 대통령의 경축사는 ‘평화 통일 3단계 기본 원칙’에 대한 것이었다. “오늘 감격과 희망의 광복절 29주년을 맞이하여 나는 먼저 남북의 5천만 동포 여러분과 더불어 뜻깊은 이날을 진심으로 경축하는 바입니다.… 조국 통일은 반드시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바로 그때였다. 아래층 뒷줄 가운데 쪽에서 총성이 울렸다. “탕!” 대통령은 총성을 듣지 못했고, 경축사를 이어갔다. “우리가 그동안…….” 검은 옷을 입은 정체불명의 사내가 앞으로 뛰쳐나오고 있었다. 남자는 단상을 향해 뛰어가며 계속해서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탕! 탕! 탕!” 대통령은 연단 뒤로 몸을 피했다. 곁에 있던 경호실장이 검은 옷을 입은 괴한을 향해 총을 쐈다. 경축식은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있었다.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던 육 여사의 상체가 순간 옆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10시 23분, 첫 총성이 울리고, 모두 일곱 발의 총성이 오가기까지의 시간은 채 20초가 되지 않았다. 괴한의 총알은 연단 뒤에 있는 태극기에 맞았고 대통령 경호원의 총에 여고생 장봉화 양이 맞아 희생되었다. - ‘제6장 하늘의 눈물 - 하오 2시, 222~223P’
박 대통령은 병원에서 육 여사의 운명을 지켜본 뒤, 수술을 집도했던 의사와 간호사들을 만나 일일이 악수를 했다. 그리고 수고했다며,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한 뒤 발길을 옮겼다. 육 여사의 유해가 서울대학교 병원을 나설 때, 하늘도 함께 울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말간 모습을 보이던 하늘은 갑자기 세찬 소나기를 퍼부었다. 이튿날 새벽 2시, 빈소에 몇 사람이 남지 않았을 때다. 박 대통령은 갑자기 유해가 안치된 대접견실로 내려와 시신을 끌어안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천지를 울릴 것만 같은 통곡이었다. 염을 하기 전에는 시신을 끌어안고 울었으며, 염을 한 후에는 육 여사의 관을 끌어안고 다시 울었다. - ‘제6장 하늘의 눈물 - 하오 2시, 227P’
육 여사의 유해가 국립묘지로 향하던 19일 아침. 대한민국은 슬픔에 잠겼다. 박 대통령은 영정을 향해 왼쪽엔 근혜를 세우고, 오른쪽으로 근영과 지만을 세운 뒤 함께 묵념했다. 떠나는 아내에게, 떠나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가족의 마지막 인사였다. 육 여사를 태운 운구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제6장 하늘의 눈물 - 군악대의 장송곡, 236P’
2012년 7월에 출간된 책 ‘육영수의 사랑 그리고 또 사랑’은 독자들에게 꾸준히 사랑을 받아온 스테디셀러다. 2년 만에 도서출판 행복에너지 최초로 판권을 해외에 수출하면서 그 진가를 드러냈다. 민족 출판사(民族出版社)를 통해 최초 5,000부를 출간하는 쾌거를 이룸으로써, 우리 국민들에게 영원한 퍼스트레이디로 추앙받는 육영수 여사의 이야기를 중국 본토에 생생하게 전하게 되었다.
책은 그 누구보다 자애롭고 지혜로웠던 육영수 여사의 극적이고 아름다웠던 삶을 추모하는 뜻에서 기록되었다. 대한민국 18대 대통령으로 국민행복시대를 추구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어머니인 육영수 여사의 탄생 일화에서 시작하여 박정희 대통령과의 만남과 사랑 등 그녀의 49년 생애를 기록하는 한편, 서거 이후의 정황 그리고 그녀의 흔적이 차후 한국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짚어본다. 또한 현재 우리들이 삶에 치여 잠시 잊고 있었던 소중한 가치들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를 갖게 한다.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이 역사의 질곡을 딛고 가파른 분수령을 넘어설 때, 육영수 여사는 역사의 제단 위에 던져진 한국의 어머니였다.”라는 평가를 기반으로 이 책을 엮어낸 동기와 목적이 여기에 있음을 밝힌 저자(문무일)의 말처럼 육영수 여사는 온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퍼스트레이디다. 살아생전 여사의 이름 앞에는 ‘국모’, ‘퍼스트레이디’, ‘한국의 어머니’, ‘청와대의 1인 야당’ 등의 무수히 많은 수식어가 붙었다. 어느 것 하나도 그 무게가 가볍지 않은 단어들이지만 이를 얻기까지 남다른 생각과 실천 그리고 숱한 노력과 관심이 있었다. 대한민국의 국민 모두는 그 노고를 잘 알고 감사함을 느꼈기에 그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아 여러 수식어들을 만들어 붙인 것이다.
저자 문무일은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을 졸업하고 문화방송(서울·부산 MBC) 아나운서로 재직하였으며 1977년부터 대한조선공사 공장 새마을 담당으로 활동했다. 1980년에 설립된 새마을운동중앙본부에 창설요원으로 활약했으며 1987년 초 도미한 후 워싱턴과 뉴욕에서 재미언론인으로 활약해 왔다. 도서출판 행복에너지에서 인생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철학을 담은 ‘길에서 길을 묻다’(2014년 2월)를 출간하여 김남조 시인과 김승옥 소설가에게 호평을 받은 작가이기도 하다.
또 다른 저자 이영호는 영남대학교를 졸업한 후 맹호부대 육군보병중위로 월남전에 참전, 대위로 전역(무공훈장, 대통령 표창)하여 내무부 공채 경찰학교를 졸업했으며, 이후 청와대에서 근무를 시작해 어린 시절의 박근혜 대통령의 경호 임무를 수행했다. 이를 바탕으로 책 ‘육영수의 사랑 그리고 또 사랑’의 실증과 현장감 제시에 무게와 깊이를 더해 주었다. 퍼스트레이디로서 보냈던 10년 9개월의 시간 내내, 언제나 따뜻한 가슴으로 가난한 나라를 그리고 그 가난한 나라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국민들을 생각했던 육영수 여사.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의 곁에서 항상 함께 울고 웃었던 우리들의 어머니를 ‘육영수의 사랑 그리고 또 사랑’의 판권 수출을 계기로 다시 한 번 그리워해 본다.
비운의 퍼스트레이디 육영수
잊혀지지 않는 대한민국 퍼스트레이디.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이 역사의 질곡을 딛고 가파른 분수령을 넘어설 때 역사의 제단 위에 던져진 한국의 어머니 육영수 여사. 이제 수천만의 가슴 속에 결코 잊히지 않을 사랑을 남기고 간 그녀의 아름다웠던 삶의 흔적을 다시 헤아려본다. 이 책 ‘비운의 퍼스트레이디 육영수의 사랑과 눈물’은 그 누구보다 자애롭고 지혜로웠던 육영수 여사의 극적이고 아름다웠던 삶을 추모하는 뜻에서 기록되었다. 육영수 여사의 탄생 일화에서 시작하여 그녀의 49년 생애를 기록하는 한편, 서거이후의 정황 그리고 그녀의 흔적이 차후 한국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짚어보며, 현재 우리들이 삶에 치여 잠시 잊고 있었던 소중한 가치들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를 갖게 한다.
살아생전 육영수 여사의 이름 앞에는 ‘국모’, ‘퍼스트레이디’, ‘한국의 어머니’, ‘청와대의 1인 야당’ 등의 무수히 많은 수식어가 따랐다. 어느 것 하나도 그 무게가 가볍지 않은 이름들이다. 하지만 이 이름들은 육영수 여사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 이름들을 얻기까지는 육영수 여사의 남 다른 생각과 실천, 그리고 숱한 노력과 관심이 있었다. 대한민국의 국민 모두는 그 노고를 잘 알고, 감사함을 느꼈기에 그에 대한 존경의 염을 담아 여러 수식어들을 만들어 붙인 것이다. 육영수 여사는 그렇게 얻은 새로운 이름과 존칭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았다.
퍼스트 레이디로써 보냈던 10년 9개월의 시간 내내, 언제나 따뜻한 가슴으로 가난한 나라를 그리고 그 가난한 나라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국민들을 생각했던 육영수 여사.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의 곁에서 항상 함께 울고 웃었던 우리들의 어머니를 이제 다시 회상해본다.
저자 문무일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을 졸업하고 문화방송(서울·부산 MBC) 아나운서로 재직하던 중, 1975년 새마을운동 취재기자로 전국 새마을 현장에 투신, 1977년부터 대한조선공사 공장 새마을 담당으로 활동했다. 1980년에 설립된 새마을운동중앙본부 창설요원으로 활약했으며, 1987년 초 도미한 후 워싱턴과 뉴욕에서 재미언론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목차>
프롤로그
책을 열면서 : 문무일
제1장 옥천, 푸르른 날에
교동집 작은 아씨
배화의 꽃봉오리
옥천여학교, 가사 선생님
6·25, 부산으로 피난을
제2장 사랑의 서약
박정희 중령의 아내
신혼살림의 어려움
혁명은 시작되고
제3장 퍼스트레이디가 되다
청와대의 야당
손수레와 미역국 그리고 국수
공인의 아내 ‘양지회’의 탄생
한 통의 편지
루르의 눈물바다
생활의 한 조각
제4장 어머니의 마음 아내의 마음
교육에 대한 열의
검소하고 서민적인 어머니
아내의 사랑 노래
제5장 그늘진 곳에 빛을
일하는 퍼스트레이디
진심을 다해
제6장 하늘의 눈물
하오 7시
군악대의 장송곡
제7장 잊지 못할 큰 사랑
나환자들의 비문
육영수 여사 추모글
묘소를 찾는 사람들
한센인의 편지
부 록 대통령의 사랑
참 고
<본문 미리보기>
육영수의 태몽은 집 마당의 맑은 연못에서 큼직한 자라가 나와 이경영의 품에 덥석 안기자, 엉겁결에 두 팔로 자라를 품에 안고 안방으로 들어온 것이라고 한다. 생명과 부귀의 상징인 자라가 품 안에 안기던 충만감과 함께 육영수가 잉태된 것이다.
육영수의 생가에는 다양한 꽃과 나무가 자랐다. 덕분에 육영수는 진흙 속에서 자라면서도 청결하고 고귀한 연꽃을 비롯해, 백년이 넘은 아름드리 은행나무와 감나무와 함께 소녀 시절을 보냈다. 생가의 연당 사랑채는 여름철 육영수의 가족들이 즐겨 찾던 장소였다. 연당에는 홍련백련이 자라고 있었으며, 주변 정원에는 온갖 꽃나무들이 가득했다. 겨울이 되면 육영수와 오빠 인수, 여동생 예수는 연당 사랑 연못에서 스케이트를 타기도 했다. - ‘제1장 옥천 푸르른 날에 - 교동집 작은 아씨, 19~20P’
남자들은 등에 짐을 지고, 여자들은 머리에 보따리를 인 채 부산으로의 피난 행렬을 이어갔다. 먹을 물도 없었고, 식기며 이부자리며 뭐 하나 멀쩡한 것이 없는 상황에서 피난민은 점점 모여들고 있었다. 육영수는 아버지가 알려준 대로 사촌 형부를 찾아갔다. 하지만 먼저온 피난민들로 인해 빈방이 없었다. 남은 가족이 부산에 닿기 전 방을 구해야 했건만, 빈방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도 없었다. 한없이 낯선 부산을 헤집고 다니며 몇 날 며칠을 고생하다 간신히 방 한 칸을 마련할 수 있었다. 부엌도 딸려있지 않은 비좁은 방이었지만, 좋고 그름을 가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부산으로 피난 온 지 열흘이 지나고 있었건만 옥천의 가족들이 당도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를 않았다. - ‘제1장 옥천 푸르른 날에 - 6·25 부산으로 피난을, 39P’
1974년 8월이었다. 필리핀의 로물로 장관이 서울대학교에서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 대통령은 로물로 장관을 위해 청와대에서 오찬을 베풀었다. 청와대로 향하던 로물로 장관이 이런 말을 했다. “박 대통령은 럭키맨이야.” 곁에 있는 사람들이 의아한 눈빛을 보내자, 로물로 장관은 이어 대답했다. “부인 육영수 여사를 두었기 때문이지. 조용히 뒤에서 남편을 뒷바라지 하는 모습을 보면 박 대통령은 정말 럭키맨이란 생각이 들어.” 며칠 뒤, 로물로 장관의 이야기가 전해졌다. “각하, 로물로 장관이 각하더러 럭키맨이라고 합니다.” “왜 내가 럭키맨이야.” “네. 육영수 여사 같은 영부인을 두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내 칭찬은 아니구먼.” - ‘제3장 퍼스트레이디가 되자 - 청와대의 야당, 91P’
육 여사는 세 자녀가 다니는 학교에서만큼은 절대로 ‘영부인’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것은 학교 선생님에 대한 존경의 의미이자, 자녀들의 교육에 대한 배려였다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모범적인 학부형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자연스레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고, 학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근혜는 어머니가 서예하던 모습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 ‘제4장 어머니의 마음 아내의 마음 - 교육에 대한 열의, 159P’
1970년 6월엔 한 사람의 비서와 함께 직접 나환자 마을을 찾았다. 경기도 양주군에 있는 성생농장과 천생원이 그곳이었다. 성생농장에 들어선 육 여사에게 나환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코는 뭉그러져서 제대로 된 형태가 아니었다. 손가락도 마디가 몇 개씩 떨어져 있었다.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간 것 같은 모습은 참혹했다. 하지만 그 사람들 사이에 보이는 아이들의 모습은 너무 해맑았다. 게다가 아이들의 얼굴이나 몸은 일반인과 다르지 않았다. 육 여사는 그곳을 둘러보고,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던 중 한 아이가 코를 흘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직 어린 이 아이는 엄마의 치마를 붙들고 있었다. “내가 코를 닦아줄까?” 육 여사는 아이 앞으로 다가간 뒤, 아이를 안아 올렸다. 그리고는 가방을 열어 손수건을 꺼내 아이의 코를 닦아 주었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나환자 마을 사람들은 크게 감동을 받았다. 아이의 어머니는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육 여사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리고는 진작 들렀어야 했는데, 너무 늦게 찾아와서 미안하다며 인사를 건넸다. 육 여사는 마을 사람들에게 인자한 미소를 띠며 인사를 한 뒤, 지도자의 손을 잡아 악수를 했다.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이어 육 여사는 곁에 있는 사람들의 손을 잡으며 상냥하게 물었다. “만나게 돼서 반갑습니다. 고생이 많으시죠? 아이는 몇이나 되세요? 농사는 잘되시나요?” - ‘제5장 그늘진 곳에 빛을 - 진심을 다해, 202~203P’
식순에 따라 경축식이 시작되었다. 먼저 국민의례가 있었고, 애국가 제창이 이어졌다. 그리고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마치자, 박 대통령의 경축사가 시작됐다. 박 대통령은 검은색과 흰색이 들어간 넥타이를 단정히 매고 있었다. 박 대통령 특유의 음성이 마이크를 타고 장내에 울려 퍼졌다. 2층 왼편에 자리한 보도진의 카메라가 조용히 돌아가고 있었다. 박 대통령의 경축사는 ‘평화 통일 3단계 기본 원칙’에 대한 것이었다. “오늘 감격과 희망의 광복절 29주년을 맞이하여 나는 먼저 남북의 5천만 동포 여러분과 더불어 뜻깊은 이날을 진심으로 경축하는 바입니다.… 조국 통일은 반드시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바로 그때였다. 아래층 뒷줄 가운데 쪽에서 총성이 울렸다. “탕!” 대통령은 총성을 듣지 못했고, 경축사를 이어갔다. “우리가 그동안…….” 검은 옷을 입은 정체불명의 사내가 앞으로 뛰쳐나오고 있었다. 남자는 단상을 향해 뛰어가며 계속해서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탕! 탕! 탕!” 대통령은 연단 뒤로 몸을 피했다. 곁에 있던 경호실장이 검은 옷을 입은 괴한을 향해 총을 쐈다. 경축식은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있었다.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던 육 여사의 상체가 순간 옆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10시 23분, 첫 총성이 울리고, 모두 일곱 발의 총성이 오가기까지의 시간은 채 20초가 되지 않았다. 괴한의 총알은 연단 뒤에 있는 태극기에 맞았고 대통령 경호원의 총에 여고생 장봉화 양이 맞아 희생되었다. - ‘제6장 하늘의 눈물 - 하오 2시, 222~223P’
박 대통령은 병원에서 육 여사의 운명을 지켜본 뒤, 수술을 집도했던 의사와 간호사들을 만나 일일이 악수를 했다. 그리고 수고했다며,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한 뒤 발길을 옮겼다. 육 여사의 유해가 서울대학교 병원을 나설 때, 하늘도 함께 울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말간 모습을 보이던 하늘은 갑자기 세찬 소나기를 퍼부었다. 이튿날 새벽 2시, 빈소에 몇 사람이 남지 않았을 때다. 박 대통령은 갑자기 유해가 안치된 대접견실로 내려와 시신을 끌어안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천지를 울릴 것만 같은 통곡이었다. 염을 하기 전에는 시신을 끌어안고 울었으며, 염을 한 후에는 육 여사의 관을 끌어안고 다시 울었다. - ‘제6장 하늘의 눈물 - 하오 2시, 227P’
육 여사의 유해가 국립묘지로 향하던 19일 아침. 대한민국은 슬픔에 잠겼다. 박 대통령은 영정을 향해 왼쪽엔 근혜를 세우고, 오른쪽으로 근영과 지만을 세운 뒤 함께 묵념했다. 떠나는 아내에게, 떠나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가족의 마지막 인사였다. 육 여사를 태운 운구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제6장 하늘의 눈물 - 군악대의 장송곡, 23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