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축제인 거제시 제52회 옥포대첩기념제전

posted Jun 12,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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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표 기자/스포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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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포대첩기념제전은 임진왜란 첫 승전인 옥포대첩을 기념하는 행사로 매년 6월 개최된다. 기념식을 비롯하여 문화예술, 민속, 이벤트행사 등이 다양하게 진행되나 세월호 사고로 인하여 올해는 제례봉행과 사생대회 백일장대회, 휘호대회로 축소하여 진행될 예정이다.

행사일정으로  의식행사가 16일(제례봉행 )   민속문화행사인 14일에 사생대회, 백일장대회, 휘호대회가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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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포대첩은 무방비 상태의 조선이 일본의 수군을 맞아 벌인 최초의 전투이자, 승전이다. 옥포만은 지형이 복잡한 거제도의 동쪽에 위치한 소규모 어항으로 임진왜란 이후 "구국의 고장"으로 자리했다.

 당시 이순신을 위시한 우리 수군이 옥포에서 큰 승리를 거둔 것은 장비나 실전 경험의 우수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조정은 왜구에 대한 방비를 전혀 세우지 못한 채 당파싸움으로 혼란스러웠으며, 무기 또한 왜구의 조총에 대적할 만한 것이 조선에는 없었다. 그러나 우리수군은 어려운 상황임에도 "나라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애국애족의 충무정신으로 일치단결하여 전투에 임하였던 것이다.

 특히 옥포대첩은 왜군의 통신 및 보급로를 차단해 왜군의 육상전진을 저지했으며, 아군의 사기진작에도 기여한 바가 크다.

 

임진년 4월 14일 부산포에 침입한 왜적은 상주, 충주를 거쳐 5월2일에는 마침내 서울을 점거하고, 6월13일에 평양에 이르면서 전국 곳곳에서 살인과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고 있었다 이때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이 율포(栗捕)만호 이영남을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였다.

 

 4월29일 구원요청을 받은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도는 경상도와 더불어 일해상접(一海相接)한 요새(要塞)라는 명석한 판단으로 출전을 결단, 5월4일 축시(丑時)에 판옥선(板屋船)24척,협선(挾船)15척,포작선(鮑作船)46척을 거느리고 전라좌수영을 출발 경상도로 향하였다. 소비포(所非浦)앞바다에 이르러 날이 저물어 하룻밤을 지낸 다음 5월5일 새벽 전함대를 지휘하여 원균과 만나기로 약속한 당포(唐捕)로 향하였다. 5일밤을 당포 앞바다에서 보내고 6일 아침에야 전선1척을 타고 도착한 원균을 만나 왜적의 정세를 상세히 듣고 남해 현령과 경사도의 진장(鎭將)들의 전선6척을 증강편성하고 거제도 남단을 거쳐 송미포(松未浦)앞바다에 이르러 밤을 지냈다.

 

 7일 새벽에는 일제히 송미포를 출발 왜적이 머무르고 있는 천성(天城) ,가덕도(加德島)를 향하였다. 오시(午時) 경, 이윽고 이들 91척의 함대가 옥포 앞바다에 이르렀을때, 이순신 장군이 타고 있던 판옥선상에 전방의 척후선(斥候船)으로부터 옥포선창에 적선이 있음을 알리는 신기전(神機箭)이 날아 들었다. 이순신 장군은 여러 장병들에게 적선의 발견을 알림과 동시에 전열을 가다듬고 준엄한 목소리로 "가볍게 움직이지 말라. 태산같이 침착하게 행동하라"는 주의와 함께 공격개시의 군령을 내렸다. 이같은 맹렬한 공격으로 옥포선창에 정박하고 있던 적선50여 척 중 30여 척이 격파되니 한창 강성(强盛)하던 적의 기세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순간이 었다. 바로 이것이 옥포대첩이요, 구국의 대첩이었다.

 

이순신은 분명 수군통제사로서 그 직위는 무관이나 그의 성격과 품성을 살펴 볼때 문관으로 봐야 옳을 듯 싶다. 그의 활약은 무관보다 지휘자인 문관에서의 활약이 더욱 앞서기 때문 이다.왜란 당시 이순신은 일본의 왜구(일본해적)의 활동을 분석하여 왜란의 조심을 간파하고 수군 조력에 전력을 다한다.

 

 그는 평소 1만수군(1만척의 배)의 조력을 역설했으며 왜란 발발후 파죽지세로 올라오는 일본에게 최초의 패배를 안겨주며 조정에 최초의 승전보를 올리게 된다.그의 전과는 임진왜란 전 기간에 걸쳐 그의 전과를 두루 살펴 볼 수 있으며,당시 지원 나온 명나라 장수 진린은 이순신을 의형제의 형의 대우로 신뢰했으며 지원된 명군의 모든 지휘통제권을 양도하기도 했다. 또한 진린은 이순신의 죽음을 전해 듣고 대성통곡을 하였다고 한다.또한 현재 미해군사관학교의 장교교육에 있어 교양 과목격으로 이순신에 대한 교육이 있다. 이순신은 선조30년 1597년 모함에 의해 지휘권을 박탈 당한후 투옥하게 되며 육군의 대장군으로 불리는 권율과의 만남을 가진다.

 

당시 권율은 그의 지략과 성품은 전란의 조선의 가장 필요한 최고의 충신이라 평하기도 했다.이순신의 전과를 살펴보면, 첫째-수군 장수로써 뛰어난 정보력으로 왜란의 조짐을 조기 간파 수 군조력에 필역 거북선의 제작을 들수 있으며 거북선은 세계최초의 철갑선 (반 잠수정의 시초로 해석하는 학자들의 의견)으로 평가된다.

 

 둘째-해군뿐만 아니라 전세계 전투역사사상 가장 적은 인원으로 가 장 많은 적을 섬멸한 최고의 기록을 수립하게 된다.

 

 셋째-당시 각국의 수군의 전쟁은 육군과는 달리 각국의 최고의 군사 무기가 동원되는 최첨단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이순신의 조선의 수 군은 신기전, 지자총통, 현자총통등과 거북선, 판옥선으로 왜란당시 유일하게 일본군을 앞지르는 화력을 보유하게 되어 최고의 정예부대 로 거듭나게 된다.

 

 넷째-부하의 대한 이순신의 배려는 상상을 초월했다. 당시 왜란시절 이순신이 통제한 삼도 수군만이 왜란당시 전사한 모든사람의 이름이 기록에 남아있으며 지금의 여수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군 장교뿐만이 아니라 일개 노비출신의 병사의 이름도 정확히 기록되어 있으며 이순신의 부하에 대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역사학자들의 평가로는 이순신이 왜란후반의 전사는 어찌 보면 온전한 영웅으로 남을 유일한 길이었음을 역설한다.이는 당시 조선의 조정의 형편은 왜란 종결후 이순신은 조정의 세력다툼에 있어 첫번째 제거대상으로 부상하는 슬픈현실에 대한 분석이며 왜란중에도 투옥되는 많은 조짐들이 보였었다.

 

 이순신은 선조31년 1598년 노량해전에서 엄청난 전과를 올리며 승전하게 되며 사후 6년째 좌의정 추증, 덕풍대원군에 봉해지며,선무 1등공신 추대된다.1643년 인조21년 무려 사후 45년후에 지금의 "충무공"의 시호를 받는다. 또한 미국의 역사학자들은 왜란당시 이순신장군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한마디로, "이순신은 시대의 최고의 명장이며 풍신수길의 대륙침략의 야망에 사형선고를 언도한 자" 라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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