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출 2천억 아웃도어업체 일군 무일푼 재봉틀 기사

posted Apr 1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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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핑 박만영 회장
㈜콜핑 박만영 회장
(양산=연합뉴스) 김영만 기자 = 국내 아웃도어 업계에서 급성장중인 ㈜콜핑의 박만영(60) 회장. 박회장은 재봉틀 기사로 출발해 연매출 2천억원이 넘는 회사를 일궜다. 2014.4.15 <<지방기사 참고>> ymkim@yna.co.kr
 

박만영 ㈜콜핑 회장 "실패 없었으면 오늘의 나도 없다"

 

(양산=연합뉴스) 김영만 기자 = 가난을 벗어나고자 무작정 고향을 떠난 18살 소년은 재봉틀 수리와 봉제를 배웠고 첫 달 월급으로 4천원 조금 넘는 돈을 손에 쥐었다.

 

지금 그는 연매출 2천억원이 넘는 아웃도어 업체 회장이 돼 있다.

 

'전쟁터'라고 불릴 만큼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국내 아웃도어 업계에서 급성장하며 주목받는 ㈜콜핑의 박만영(60) 회장.

 

15일 경남 양산시에 있는 회사에서 만난 박 회장은 자신의 성공 비결로 실패를 딛고 일어선 자신감, 근면성, 도전정신을 꼽았다.

 

그는 1954년 경남 밀양시 단장면 고례리에서 가난한 농민의 6남1녀 중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마을은 지금 물속에 있다. 밀양댐 건설로 수몰됐다.

 

"입은 많은데 먹을 게 없어서 허기진 배를 채우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산밖에 보이지 않았다"는 그는 "당장 배고픔 해결하는 게 급해 커서 무엇이 되고픈 꿈을 꿀 여유조차 없었다"고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회고했다.

 

농사를 도우느라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등 학업을 제대로 잇지도 못했다. 고향에 더 있어봤자 길이 안 보인다고 생각한 그는 야반도주하다시피 집을 떠나 부산으로 갔다. 여기저기 떠돌다가 섬유공장에 취직했다.

 

그곳에서 재봉틀 수리공으로 일하면서 틈틈이 봉제 일을 배웠다. 첫 월급은 4천800원이었다.

 

2년가량 근무 후에 군에 입대하면서 회사를 떠났다가 제대하고 가보니 이미 딴 사람이 그 자리에 있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서울, 부산, 마산 등지를 돌아다니며 재봉틀 기계를 고치다가 텐트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27살에 부산 부전시장에서 사회 친구들과 동업해 텐트와 점퍼 등을 만드는 가게를 차렸으나 서로 뜻이 맞지 않아 2년 만에 접었다.

 

이때 번 돈을 밑천으로 29살이 된 1983년에 텐트 만드는 회사를 세웠다. 처음에는 봉제 임가공을 하면서 수통 피와 야전삽 피 등을 만들어 회사 외형을 조금씩 키워갔다.

 

재봉틀 몇 대로 시작한 회사는 텐트와 배낭 등을 주문자상표부착방식(OEM)으로 수출하면서 급성장했다.

 

수출용 제품을 만들고 남는 자투리 재료로 내수용 텐트 등을 만들어 팔았는데 상표를 뭘로 할까 고민하다가 '코리아'와 '캠핑'을 합쳐 콜핑이라고 이름지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캠핑용품 업체가 되겠다는 포부를 담았다고 그는 말했다.

 

1995년에 1천만 달러 수출을 달성했고 직원 수가 450여 명에 달하는 등 승승장구하던 그였지만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 발발 1년 전인 1996년 6월에 60억원의 부도를 내고 일순간에 빈털터리가 됐다.

 

주로 일본에 텐트를 수출했는데 우리 기업들끼리 제살깎기 경쟁을 하는 바람에 채산성이 나빠져 결국 수출을 포기하고 내수로 돌렸지만 그마저 불황으로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원자재 대금은 꼬박꼬박 줘야 하는 반면에 판매대금으로 받은 어음과 가계수표가 줄줄이 부도나 휴짓조각이 되면서 결국 자금난을 이기지 못했다.

 

"공장은 물론이고 땅과 집, 수백 대의 기계가 모두 채권자로 넘어가고 수중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그는 힘들었던 당시 상황을 전했다.

 

빚 독촉에 시달리다 못해 가족을 남의 집에 더부살이시킨 채 무작정 지리산에 들어갔다. 청학동 아래 마을에서 2개월간 텐트 등에 머물며 실패에 대해 철저히 반성했다. 찬이슬 맞으면서 그는 "가족을 위해서라도 다시 일어서야 한다"고 재기를 결심했다.

 

산에서 내려와 1년간 마땅한 일거리를 찾지 못하다가 지인의 돈을 빌려 부인과 함께 부산 해운대구 수영만요트경기장 안에 있던 중소기업관에서 옷장사를 시작했다.

 

처음엔 손님들을 향해 입도 떼지 못한 채 멍하니 있었다. 옆 가게 주인에게서 "당신은 장사할 사람이 못 된다"는 핀잔까지 들어야 했다.

 

막걸리 한 병을 비우고 조금 취한 상태가 되니 창피한 걸 잊고 옷을 팔 수 있었다. 당시 국내에 등산복이라는 개념 자체가 거의 없던 시절이라 그가 직접 디자인해서 만든 바람막이와 조끼 등이 제법 잘 팔렸다.

 

울산시가 태화교 아래에서 연 중소기업장터에도 참가했는데 불티나게 옷이 팔렸다. 중간에 물건이 동나 급하게 부산에서 가져오기도 했다. 그날 큰 배낭에 꽉 찰 만큼 돈을 벌었는데 부인과 함께 밤새 세보니 5천만원이나 됐다.

"아~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구나." 다시 용기를 얻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전국을 돌며 보따리 장사를 했다.

 

"전국에 안 가 본 데가 없을 정도로 돌아다녔다"며 "봄부터 떠돌기 시작해 해남 땅끝마을에서 추석을 맞은 적도 있다"고 소개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경남 양산에 작은 창고 하나를 마련하고 부산에 있는 공장에 의뢰해 옷과 텐트를 만들어 팔았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물건이 잘 만들어지는지 부산 공장을 둘러보고 금요일과 주말에는 대구, 대전, 광주 등지의 판매처를 순회하고서 일요일 새벽 3~4시에 돌아오는 강행군을 반복했다. 현장 경영을 중요시하는 그는 환갑의 나이에도 이 일정을 실천하고 있다.

 

유럽에 텐트를 수출했을 때 경험을 살려 등산복, 등산용품, 등산화 등 품목을 늘려나갔다.

 

그는 이미 20여년 전에 우리나라에도 아웃도어 시대가 열릴 것으로 예감했다고 말했다.

 

1980년대 후반 텐트 수출 상담차 유럽에 갔을 때 현지 바이어가 싸늘한 사무실에서 두툼한 등산복을 입고 전혀 추위를 느끼지 않는 것을 보고 우리나라도 국민소득이 높아지면 곧 아웃도어가 유행할 것으로 직감했다고 밝혔다.

 

회사에 여유가 생기자 2000년 들어서 아웃도어 사업을 본격화했다, 지금은 텐트와 의류는 물론 등산화, 배낭, 장갑, 모자, 스틱, 아이젠 등 거의 모든 품목을 판매하고 있다.

 

"국내에서 판매되는 아웃도어 제품 가운데 히말라야 등정까지 할 수 있는 브랜드는 다섯 손가락 정도인데 콜핑도 그 가운데 하나"라고 자랑했다.

그는 "좋은 제품을 소비자도 만족하는 제값을 받고 파는 것이 경영 철학이다"고 강조했다.

 

그는 "아웃도어 시장이 포화상태라고 말하는데 나는 전망이 매우 밝다고 본다"며 가까이에 우리와 체형이 비슷한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에 20억 명의 거대한 시장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중국 소비자들이 아웃도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 우리 업체들에게는 엄청난 기회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콜핑은 현재 중국에 34개 매장을 두고 있다.

그는 중국시장은 서두르면 안된다며 차근차근 준비해 나가겠다고 계획을 밝혔다.

 

그는 "까다로운 국내 소비자와 업체들간 치열간 경쟁이 국내 아웃도어 업계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며 "한국에서 통하면 세계 어디에서나 통한다"고 말했다.

 

그는 70세가 되기 전에 매출 1조원을 달성하고 한국을 뛰어넘어 세계 아웃도어 브랜드 5위권 안에 진입하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

 

콜핑은 지난해 2천200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올해는 2천800억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콜핑은 국내 아웃도업 업체 가운데 유일하게 본사가 지방에 있다. 그는 "불편한 점이 있지만 지방에 본사를 둔 토종 브랜드를 끝까지 고수할 것이다"고 강조했다.

 

자신이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고 기업을 키운 탓에 그는 사회공헌활동에도 열심이다.

 

지난달 20일 경남 양산의 본사 확장 이전식 때 축하화환 대신에 쌀을 보내달라고 부탁해 받은 쌀 4천700㎏을 양산시에 기증했고 전국 대학의 섬유 관련 학과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대한산악연맹 울산시연맹 회장으로서 원정자금 마련에 애를 먹는 해외등반대를 돕는 등 국내 산악인들을 위해 지금까지 수십억원을 지원했다.

 

부산섬유패션연합회 회장을 맡아 지역 섬유패션산업 중흥을 꾀하는 그는 정부의 과거 산업정책에 쓴소리를 거침없이 쏟아냈다.

 

그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봉제산업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IMF 구제금융 직후 정부가 봉제·섬유를 사양산업으로 치부하는 바람에 많은 업체가 앞다퉈 문을 닫았으며 관련 기계·장비가 중국으로 넘어갔다"고 한탄했다.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30년에 걸쳐 배우고 들여온 것을 불과 1~2년 만에 중국으로 모두 넘겨 주고 말았다. 이제는 국내에서 제품을 생산하고 싶어도 설비가 없어서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고용을 많이 창출하는 산업인 만큼 지금이라도 정부가 이 분야에 관심을 두고 적극 지원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런 차원의 하나로 부산섬유패션산업회에서 섬유아카데미를 운영,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있다. 이 과정을 이수한 청년들 가운데 일부에게 그는 사비를 지원해 외국에 서 전문적인 공부를 하게 하고서 콜핑 직원으로 채용하고 있다. 다른 회사에 취업도 알선하고 있다.

 

"실패를 이겨내고 얻는 자신감이 있으면 무엇이든 도전해 결실을 볼 수 있다. 실패가 없었다면 오늘의 나와 콜핑은 없다."

 

박 회장이 취업난 등으로 좌절하며 고민하는 청년들에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끊임없이 도전하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ymkim@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4/04/15 10:07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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