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만에 신작 시집 '사진관집 이층' 펴내
(서울=연합뉴스) 신창용 기자 = "아무래도 나는 늘 음지에 서 있었던 것 같다/ 개선하는 씨름꾼을 따라가며 환호하는 대신/ 패배한 장사 편에 서서 주먹을 부르쥐었고/ 몇십만이 모이는 유세장을 마다하고/ 코흘리개만 모아놓은 초라한 후보 앞에서 갈채했다/ 그래서 나는 늘 슬프고 안타깝고 아쉬웠지만/ 나를 불행하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나는 그러면서 행복했고/ 사람 사는 게 다 그러려니 여겼다// 쓰러진 것들의 조각난 꿈을 이어주는/ 큰 손이 있다고 결코 믿지 않으면서도"
올해 팔순을 맞은 신경림 시인이 열한 번째 시집이자 '낙타'(2008) 이후 6년 만에 내놓은 신작 시집 '사진관집 이층'(창비 펴냄)에 나오는 '쓰러진 것들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시다.
이 시처럼 신경림 시인을 잘 드러내는 시가 또 있을까. 올해로 등단 59년차에 접어드는 그는 항상 쓰러진 자들의 편에 섰다. 쓰러지고 짓밟힌 존재들의 상처와 아픔을 어루만지고 다독거리며 그들의 꿈을 노래했다. '가난한 사랑노래'(1988)에서 "가난하다고 왜 사랑을 모르겠는가"라고 절창한 것처럼.
최근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만난 시인은 이 시에 얽힌 사연을 소개했다. 원래 이 시는 그가 1993년에 펴낸 시집 '쓰러진 자의 꿈'의 표제작이 될 뻔한 시였으나 마지막 편집 과정에서 뺐다고 한다. 그때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다시 써놓고 봐도 역시 만족스럽지 않다고 시인은 불만이다.
언젠가 이 시를 다시 쓰겠다고 미루고 미루다가 무려 20여 년이 지나서야 결심한 것은 이제 황혼의 고갯마루에 이른 그에게 이번 시집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지나온 길을 자꾸만 돌아다보며 빛바랜 흑백사진으로 들어간 그리운 얼굴들을 꿈꾸듯 불러낸다.
"서른해 동안 서울 살면서" 집에서 시장까지의 짧은 길만 오가며 사셨지만 "아름다운 것,/ 신기한 것 지천으로 보았을" 어머니('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죽어서도 떠나지 못할" 산동네에서 살다 돌아가셨지만 시인의 마음속에는 그곳에서 "지금도 살고 계신" 아버지와 "아들도 몰라보고 어데서 온 누구냐고 시도 때도 없이 물어쌓"던 "망령 난" 할머니('안양시 비산동 489의 43), "부엌이 따로 없는" 무허가촌 사글셋방에서의 가난한 삶 속에서 일찍이 사별한 아내('가난한 아내와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나는'), 그들은 이제 모두 떠나고 세상은 바뀌고 또 바뀌었지만 시인은 여전히 꿈인 듯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는 아득한 그리움에 젖는다.
시인은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뜬 친구들도 추억했다. 재야 철학자 민병산은 환갑 바로 전날 세상을 떠났다. 시인이 그날을 위해 준비한 축시는 조시로 바뀌었다. 어느 날 인사동에서 친구가 남긴 글씨 한 폭을 보고서 시인은 생각한다.
"내가 그의 결기 있는 죽음을 부러워하지 않았던 것은/ 살아남아서 무슨 일이고/ 조금은 더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을 터지만./ (중략)/ 나는 늘 허망했다. 그보다 더 오래 살면서/ 내가 한 일이 무엇인가./ 많은 곳을 다니고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것을 보고 많은 일을 겪었을 뿐./ 그뿐, 오직 그뿐이니."('세월청송로(歲月靑松老)')
시인은 "이제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나이가 됐다"면서 "한동안은 죽음이라는 것이 두려움을 가져다줬는데, 나이를 먹으면서 차츰 두려움과도 친숙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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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년 만에 시집 '사진관집 이층' 낸 신경림 시인
- (서울=연합뉴스) 신준희 기자 = 최근 시집 '사진관집 이층'을 펴낸 신경림(79) 시인. 시인의 열한 번째 신작 시집이자 '낙타'(2008) 이후 6년 만에 펴내는 시집이다.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 2014.1.16 << 문화부 기사 참조 >> hama@yna.co.kr
죽음에 대한 생각은 종교에 대한 회의로 이어졌다. "우리 사회가 참 문제가 많은데 항상 피해보는 것은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이 있으면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만 골라서 피해를 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겁니다."
시인은 시집에서 "쓰나미 속에서 팔 하나가 잘려나간 부처님"이 "빙그레 웃고만 계신"('빙그레 웃고만 계신다') 모습에 섬뜩함을 느끼고 "하느님은 지금/ 어데서 어떤 눈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시는가"('신발들') 탄식하듯 묻는다.
더군다나 우리 사회의 외형은 풍요로워 졌지만, 사회적 갈등과 빈부격차 문제는 여전히 심각하다며 시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뜻대로 안 되는 세상을 미워하면서도 그는 세상과 다투지 않는다.
"시는 옳은 소리 하고 가르치는 게 아닙니다. 다만 나무처럼 사람들 곁에서 즐거움과 위로를 주는 것이죠. 옳은 소리 속에는 독선이 있고 누굴 가르치려고 드는 속에는 오만 같은 게 있어요. 시는 그런 것을 벗어났을 때 정말 아름다운 시가 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요즘 사람들이 시를 읽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아쉬워할 게 없다고 말했다. 시는 원래 많은 사람이 읽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소수의 진짜 시 좋아하는 사람들만이 읽으면 충분하다고 했다.
그는 "산문보다 넓진 않지만 좁게 깊게 독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게 바로 시"라고 규정했다. 그는 시를 안 읽는 세태에는 시인의 책임도 있다고 지적했다. 난해시가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아무리 읽어도 읽히지 않는 어려운 시는 독자를 떨어져 나가게 한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시인은 마치 모범을 보이듯 이번 시집에서 단순하고 소박한 시편들을 여럿 선보였다. 그중 '별'은 압권이다.
"나이 들어 눈 어두우니 별이 보인다/ 반짝반짝 서울 하늘에 별이 보인다// 하늘에 별이 보이니/ 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고/ 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니/ 사람들 사이에 별이 보인다// 반짝반짝 탁한 하늘에 별이 보인다/ 눈 밝아 보이지 않던 별이 보인다"
시인의 주요 작품으로는 시집 '농무', '새재', '가난한 사랑노래', '길', '쓰러진 자의 꿈',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뿔', '낙타' 등과 동시집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산문집 '민요기행', '시인을 찾아서 1·2' 등이 있다.
만해문학상, 단재문학상, 대산문학상, 시카다상, 만해대상, 호암상 등을 수상했으며,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동국대 석좌교수로 있다.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2014/01/16 07:00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