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만에 새 시집 '추사를 훔치다' 출간
(서울=연합뉴스) 신창용 기자 = 한국시인협회장을 지낸 이근배(74) 시인은 무려 52년간 시를 써왔지만 아직도 시라는 것이 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시를 쓴다는 것은 언제나 앞이 캄캄한 일이고 거짓말 같고 그래서 시집을 내는 게 부끄러웠다고 털어놨다. 그런 그가 9년간의 침묵을 깨고 새 시집 '추사를 훔치다'(문학수첩 펴냄)를 냈다.
그는 10일 서울 광화문의 한 중식당에서 기자들과 만나 새 시집을 낸 소회를 추사 김정희가 친구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의 한 토막에 빗대어 표현했다.
추사는 그 편지에서 "열 개의 벼루를 갈아 바닥을 내고 천 개의 붓을 닳도록 썼지만, 편지 글씨 하나도 못 익혔다"고 적었다.
그는 "저 추사는 천 개의 붓을 다 쓰고도 글씨가 안 된다고 했는데, 나는 어떻게 붓을 잡을까 싶었다"고 말했다.
절망하던 그를 다시 흔들어 깨운 것은 다시 추사였다. 추사의 벼루가 유혹하고 조상의 솜씨가 빚어낸 그림, 청자 백자 등의 예술품들이 꿈자리를 어지럽히고 귀엣말로 혼을 두드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렇게 귀신에 홀린 듯 시를 쓰기 시작했다. 이번 시집의 제목을 '추사를 훔치다'라고 정한 것도 그래서다. 그 소중한 것들의 부름에 응한 것뿐이라는 것이다.
"제가 시인협회장 할 때 김춘수 선생이 좋은 말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좋은 시는 있지만 위대한 시는 없다고. 그렇다면, 위대한 시는 뭐냐? 속된 말로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고 하잖아요. 가장 한국적인 시가 위대한 시일 수 있다는데 생각이 미쳤죠."
그는 이번 시집에서 우리 고유의 정신을 찾아 나섰다. 벼루와 연적 등을 통해 사라져버린 시대의 전통과 아름다움을 구현했다.
여러 편으로 이뤄진 '벼루 읽기' 연작시에서 그는 "혹시 원효, 솔거, 김생, 최치원…, 그런/ 대문장이거나 신필들이 먹을 갈던 벼루?/ 돌처럼 구워진 흙에 아직도 숨 쉬는 먹내음/ 코를 벌름거리며 뺨도 대보고/ 손으로 문질러보는 느낌이 알싸하다"며 독자들을 한 세기 전의 유연한 묵향 속으로 돌려놓는다.
아울러 "마르지 않는 신명으로/ (중략)/ 피리를 들면/ 하늘엔 노을이 타고/ 거문고를 안으면/ 소나무에 불을 붙이던 바람"('정철' 중에서), "살아서 못 이룬 꿈/ 죽어서 묻힐 땅에 심었느니/ 그 누구도 가져가지 못할/ 뜨거운 목숨을 노래했느니"('윤선도' 중에서)라며 시 속에 옛 인물들을 불러모은다.
시집에선 집안 대대로 물려받은 선비 정신의 일단을 보여주기도 한다.
"장학사의 외손자요/ 이학자의 손자"로 태어난 그는 "나라 찾는 일 하겠다고/ 감옥을 드나들더니 광복이 되어서도/ 집에는 못 들어오는 아버지" 때문에 가난의 족쇄를 물려받아야 했지만 유년기에 대해 "어느 권력 어느 재산과도 바꾸지 않을/ 내게는 값진 유산"이라고 당당히 밝힌다.
그는 "결국은 어떤 사물을 소재로 삼든 인간이 개입하는 것이 시다. 거기에는 나를 집어넣어야 한다. 남을 집어넣으면 맛이 없다"면서 "시는 감성이 아니라 체험이라고 했다. 왜 시인은 언어의 지배자인가. 그것은 체험의 지배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시에는 만들어지는 시와 우러나오는 시가 있다고 분류했다. 만들어지는 시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지만 감동은 별로 없는데 반해 우러나오는 시는 수사법이 엉성하더라도 감동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저처럼 나이 든 문인들이 요즘 시는 알 수 없는 소리로만 가득하다고 한탄하는데, 시는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전달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결국 글감은 내 속에 있다. 자기 속에 있는 것을 캐내서 그것을 시대와 사상, 철학과 접목해야 한다"면서 "거기에다 한국이라는 커다란 모티브를 인류 앞에 제시해서 한국의 시라는 게 이렇구나 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시, 그러면 위대한 시일 수 있다고 믿는다"고 강조했다.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2014/01/10 15:42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