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택 처형, 그러나 ‘판문각’은 평온했다

posted Dec 17,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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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성택 처형, 그러나 ‘판문각’은 평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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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경협국민운동본부 법률아카데미 7기생 36명

      수료여행으로 눈 덮인 서부지역 DMZ 방문

 

[류재복 대기자/스포츠닷컴]

2013년 12월 14일 오전 9시, 서울 합정동 지하철역 2번 출구에 정차중인 서울72바8853호 리무진버스에 올랐다. 이날아침, 날씨는 흐렸으며 온도는 영하 11도로 조금 추웠다. 버스가 향하는 곳은 판문점, 사단법인 남북경협국민운동본부가 매년 운영하는 법률아카데미 7기가 지난 11월 27에 종료, 7기를 수료한 각계인사들을 위해 수료기념으로 1일 겨울여행을 떠나는 것인데 북한을 마주보고 있는 판문점과 DMZ 지역을 택한 것은 그만큼 이유가 있었다.

 

사단법인 남북경협국민운동본부는 창립 10주년이 되는 NGO단체로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인 이장희 박사가 상임대표를 맡고 있는 국내유일의 남북경협을 연구하는 시민단체로 연중 많은 행사를 치루고 있으며 그 하나로 서울시의 후원을 받아 매년 법률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는데 매기 수료생이 평균 60명에 이른다.

 

남북경협 법률아카데미의 목적과 취지를 보면 ‘남북경협이 대내외적 상황변화에도 불구하고 위축되거나 중단되지 않고 계속 발전하기 위하여는 법적, 제도적 기반이 필요하고 이를 굳건히 구축하는 것이 시대의 과제로 남북경협을 뒷받침하는 법률전문가와 실무가를 양성’하는데 두고 있으며 지난 2007년 10월, 제1기를 시작으로 올해 7기 수료식을 가진바 있다.

 

특히 올해 제7기 강좌부터 대한변협에서는 본 아카데미 강좌에 대하여 ‘변호사 특별연수과정’으로 지정을 한바 있다. 이러한 과정의 법률아카데미를 수료하면 수료 기념차 평양, 개성, 금강산 등을 여행으로 다녀왔는데 이명박 정부 부터는 남북의 교류단절로 북한 땅을 밟지는 못하고 대신 판문점을 비롯, DMZ를 방문, 답사하는 것으로 돼 있다.

 

이에 이날 법률아카데미 7기생중 희망자 36명이 자유로를 달리게 된 것이다. 허지만 필자는 7기가 아닌 2기 수료생으로 본부의 홍보위원장 직책이 있어 이날의 행사를 취재하기 위해 동승을 한 것인데 이날 아침 집을 나서면서 편의점 가판대에서 구입한 한 일간지의 1면 톱기사 때문에 마음이 몹시 착잡했다. 신문 1면 머리에는 ‘북한 장성택 처형’이란 제목으로 신문의 6개면에 온통 관련기사 내용이 도배가 돼 있었다.

 

장성택, 그는 누구인가? 그는 고(故) 김일성 주석의 사위요, 고(故) 김정일 위원장의 매제요. 김정은의 고모부라는 막강한 혈연에서 이루어진 북한의 실세중의 실세로 꼽히는 김정은 다음의 2인자였다. 그런 그가 갑자기 실각설이 나돌더니 체포가 되고 체포 된지 5일만에 전격 처형이 되었고 북한에서는 그 순간을 이례적으로 공개를 하면서 전 세계가 알게 된 것이다.

 

 자유로 달리는 버스 안, 장성택 처형 놓고 의견 분분

 장성택은 개혁개방론자, 친중파 인사로 북한 2인자

 

7기생들을 태운 리무진버스는 계속 자유로를 달렸고 버스 안에서는 온통 화제가 장성택의 처형 이야기였다. 또 그렇게 돼야만 했던 이유들에 대해서도 제각기 말들을 했다. 북한이 장성택 숙청 사실을 공개한 이후, 장성택을 둘러싼 각종 소문이 난무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김정은의 부인인 리설주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주장이 제기돼 눈길을 끈바 있었다.

 

이날 아침, 필자는 달리는 차창 밖을 바라보며 장성택에 대하여 나름대로 조용히 생각했다. 그는 남쪽인 한국에도 다녀간 개혁과 개방의 이념이 많은 사람이었다. 올 1월 초, 그는 남쪽에서 있을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식에도 참석하고 싶다는 생각을 보였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우리쪽 에서는 그의 뜻을 받아주지 않았다. 만약 그때, 그를 초청,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벌어진 대통령 취임식에 앉아있는 그를 발견했다면 남북관계는 달라졌을 것이고 또 그의 운명에도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나 평양 땅을 밟아보고 또 남북교류를 위해 일을 한 필자의 견해로는 처형의 주된 이유가 출중한 인물 이였던 인간 장성택 그의 "리더십"과 또 "그의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 때문이었다고 본다. 즉, 김정은의 권력이 분산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권력은 실세에게로 몰리는 것이다. 정치는 자연과 다를 바 없다. 크고 강력한 쪽으로 사람은 모이게 되어있다.

 

장성택은 그만한 파워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고 그것에 대해 김정은은 스스로 위협을 느꼈다고 본다. 즉, 장성택의 주변에 몰린 권력을 배 아파하고 아니꼽게 보던 여럿 인사들이 김정은을 부추긴 것이다. 여기에 부합되는 이유로 김정일 시대에는 군부가 행정과 재정을 좌지우지 했는데 김정은 등극 후 장성택이 모든 국가권력을 갖게 되자 군부가 장성택을 좋지 않게 보고 특히 정적인 최룡해가 장성택을 제거하려고 마음 먹었을 것이다.

 

장성택 처형에 대한 소식, 그리고 이에 관한 분분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버스는 임진각에 도착했는데 마침 눈이 내려 형성된 설경의 멋에 착잡했던 마음이 사라지면서 환호와 함께 일행들은 임진각 곳곳의 모습을 돌아보고 단체 및 삼삼오오 사진들을 찍은 후 통일대교를 건너 도라전망대에 도착,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밖을 보면서 전망대 설명을 들었는데 북녘 산하에 내리는 눈이 마치 장성택의 사망을 애도해 주는 듯 했다.

 

북녘지척 도라산, 장성택 애도하는 듯 함박눈 펑펑

시찾은 판문각, 고요 적막감에 북측哨兵 부동자세

 

이어 도라산 역에서 평양행 열차표를 예약(?)해 놓고 관광차 이곳을 찾은 중국인들과도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도라산역 보다는 마침 펑펑 내리고 있는 함박눈의 설경 모습에 “헌 까오씽, 쑤에 시하, 티엔치 하오!”(매우 기분이 좋다, 눈 내리는 날씨가 좋다)고 말했다. 도라산역을 비롯해 서부전선 DMZ를 찾는 외국인중 중국인 관광객이 80%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중국인 그들은 분명 우리나라에 외화를 바치는 귀중한 자원이었다.

 

도라산을 떠나 오찬을 가지려고 도착한 곳이 통일촌의 부녀식당, 이곳에서 파주 장단콩 으로 만든 된장찌개로 식사를 했는데 반찬의 맛과 눈 내리는 밖을 볼 때는 막걸리 한 사발씩을 마시는 것이 운치가 났지만 “오후에 판문점 견학이 있어 긴장감을 가져야 하기에 참고 뒷풀이에서 실컷 마시자”는 이오영 변호사(법률아카데미 원장)의 말에 모두가 동의를 했다.

 

오찬을 마친 후 일행은 해마루촌에 도착, 마을 청년회장으로부터 상세한 마을의 유래와 현황을 들었는데 묘하게도 이때는 하늘에 구름한 점 없는 쾌청한 날씨 속에 영상의 온도를 느꼈다. 때문에 장성택으로 인했던 무겁던 감정이 조금은 사라지면서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일상의 생각에서 해마루촌을 돌아보며 맑은 공기와 눈부신 설경에 기분이 맑아졌다.

 

다음 도착지는 제3땅굴이었다. 원래 계획은 허준선생 묘나 덕진산성을 답사하기로 했는데 눈이 쌓여있기에 안전을 고려, 대신 제3땅굴을 택한 것이다. 이곳 땅굴에도 중국인들이 대거 몰려와 모든 안내판이 중국어로 돼 있었다. 중국의 힘이 제주도를 접수하고 부산에 이어 이제 DMZ 지역에까지 미치고 있는 것이다. 제3땅굴에서는 현장 견학시 카메라, 휴대폰 등을 일체 소지하질 못하게 하는 것이 타 땅굴견학과 다른 것이 특이했다.

 

이어 도착한 곳이 이날의 하이라이트인 판문점, JSA 경비병의 안내에 따라 북한의 판문각 앞에 당도를 했는데 북한 측 초병의 서 있는 모습이 지척에서 보이는 판문각은 강렬한 겨울햇빛을 받아 반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장성택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듯 아랑곳 없이 우리 36명의 눈 앞에 전개 되었다. 진한 선그라스를 쓰고 두 주먹을 쥐고 마네킹 처럼 서 있는 우리 측 초병과 함께 오직 깊은 적막감만이 흘렀다.그리고 평온했다.

 

1953년 7월 27일, 이곳에서 북, 중,UN간에 정전협정 조인을 맺으면서 6·25전쟁은 휴전상태로 끝을 맺고 그때부터 이곳은 UN과 북한 측의 '공동경비구역으로 전후좌우 경계간의 직선거리가 800m에 불과하나 이곳에는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장을 비롯해 UN측의 '평화의 집', 북측의 '판문각' 등 24개동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기존의 적십자회담 외에도 경제회담, 국회회담,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단일 팀 구성 등이 이곳에서 열렸다. 그리고 1985년 9월 20일부터 4일 동안 서울과 평양에서 이루어진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 공연단 교환 공연'은 남북분단 이후 최초로 판문점을 통과한 민간차원의 왕래로 기록되었다.

 

경비병의 안내에 따라 회담장을 돌아보고 기념사진을 찍고 나온 일행은 1974년에 벌어진 8.18도끼만행의 현장을 거쳐 경비부대로 복귀, 기념품센터를 끝으로 이날의 DMZ 현장견학 일정을 모두 종료하고 오후 5시, 서울로 돌아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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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재복 大記者 yjb08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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