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신창용 기자 = 시인이자 극작가, 문화운동가인 김경주 씨가 최근 내놓은 신작 에세이 '펄프극장'은 박형서 고려대 교수의 2006년 소설집 '자정의 픽션'의 계보를 잇는 작품이다.
두 작품은 블랙 유머라는 유머의 코드에서 공통분모를 갖지만 '자정의 픽션'이 이지적이라면 '펄프 극장'은 질펀하다. 발문을 쓴 김봉현 힙합·대중음악 평론가는 아예 이 책을 '본격 얼간이즘 팩션'이라고 부른다.
"장난기로는 시시하게 덮어버릴 수 없는 아이디어와 재기, 문장력, 디테일로 가득한 이 책은 세상 모든 얼간이에게 어깨동무하는 책이다. 모든 얼간이는 부디 이 책에서 휴식하기 바란다."('발문' 중에서)
김경주 작가는 이 책에서 장난기 가득하고 굴절된 감수성으로 크리스마스 실, 좌약, 추잉검, 이발소 그림, 타자기, 트랜지스터 라디오, 종이학, 쥐덫에 이르기까지 추억의 사물 50여 개를 기억하고 묘사한다.
앨리스 가이 블로슈라는 인물의 입을 빌려 털어놓은 '좌약'과 관련한 토막이야기는 배꼽을 잡게 한다.
"앨리스 가이 블로슈의 아버지는 좌약 신봉자셨다. 열이 날 때마다 먹는 약보다는 밀어 넣는 좌약을 더 신뢰하셨다. 아버지는 치질로 오랫동안 고생을 좀 하셨는데 이 좌약을 효과를 보셨는지 누이들과 앨리스 가이 블라슈 그리고 어머니까지 열만 나면 냉동실에 보관해두신 포탄 좌약을 꺼내오셨다. 어머니는 말했다.
'어쩌겠니? 네 아버진 군인 출신이라 원래 총알처럼 생긴 것에 대해 믿음이 강하신 분이야.'"(56쪽)
작가는 지인에게 "힙합 평론을 쓰면서 왜 친한 흑인 친구가 한 명도 없냐"고 놀리고 "왕가위의 영화를 볼 때 큰 가위를 옆에 두고 본 적이 있으며 '안네의 일기'를 읽고 필 받아서 자물쇠 달린 일기장을 구입했고, 매일 일기를 쓰다가 독일군한테 걸리면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접은 적이 있는" 그런 사내다.
1980년대에 유년 시절을 보내고 1990년대에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닌 세대라면 책을 읽으면서 이 책에 담긴 위트와 농담, 페이소스에 자신도 모르게 킥킥거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결국 자신이 지나왔던 한 시대와 깊숙하게 만나게 될 것이다.
소설가 김중혁은 이 책을 두고 '뛰어난 마술 교과서'라고 말한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을 선택한 후 그 사물의 숨겨진 이야기를 보여준다. 통조림, 고양이, 하모니카, 아코디언을 가지고 마술을 부린다. 마술이 끝나고 나면 사물이 변해 있다"고 말이다.
글항아리. 372쪽. 1만4천원.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2013/12/14 08:00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