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독립' 첫 천명한 카이로선언 70주년

posted Nov 22,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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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영국·중국 정상 모여 `코리아 자유·독립' 첫 결정

 

당시 회담본부 메나하우스서 `70주년 기념 학술대회' 개최

 

(카이로=연합뉴스) 한상용 특파원 = 한국 역사 교과서에 빠짐없이 나오는 '카이로선언'(Cairo Declaration).

 

최초 발표 당시 카이로 코뮈니케(Cairo Communique)로 불린 이 선언은 일본 패망을 2년 앞둔 1943년 식민지 상태에 있었던 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에 처음으로 천명했다는 점에서 우리에겐 그 의미가 남다르다.

 

1943년 11월 22일.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장제스(蔣介石) 중국 총통 등 3개국 정상은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회합을 갖는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방안을 협의하고 일본 패전 처리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였다.

 

26일까지 닷새간의 회담이 끝난 뒤 3개국 정상은 이집트를 떠났지만 코뮈니케는 12월1일이 돼서야 전 세계 언론에 공표됐다. 보안상 이유와 무엇보다 회담에 참석하지 않았던 구 소련 지도자 스탈린의 동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대서양 헌장의 이념을 근거로 탄생한 이 선언에는 일본은 무조건 항복해야 하며 한국을 자유 독립케 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전체 11개 문장으로 구성된 선언문에 한국 독립에 관한 내용은 뒤쪽 3줄짜리 10번째 문장이다.

 

"세 강대국은 한국 인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해 적절한 과정을 거쳐 한국이 자유롭고 독립될 것임을 결의한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한국(KOREA)' 독립에 관한 조항을 명시적으로 넣으면서 한반도 독립을 국제적으로 보장한 것이다.

 

카이로 선언문에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을 때까지 연합국은 장기적 군사 압력을 가하고 만주와 대만, 펑후군도 등 일본이 탈취한 영토는 중국에 반환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한국 독립과 관련한 핵심 문구는 2차례나 바뀌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미국 국무부 외교문서와 중국의 '카이로 선언' 관련 문서에 따르면 루스벨트의 지시로 특별 보좌관인 해리 홉킨스가 카이로선언 초안을 작성했다.

 

루스벨트와 장제스 두 정상의 첫 회담 내용이 토대가 됐다.

 

홉킨스가 작성한 첫 초안에는 한국의 독립 시기를 '일본 몰락 후 가능한 빠른 시기'(at the earliest possible moment after the downfall of Japan)'로 기록됐다.

 

루스벨트는 이 초안에서 '가능한 빠른 시기'를 '적절한 시기'(at the proper moment after the downfall of Japan)로 고쳤다.

 

처칠은 회담 끝에 해당 문구를 '적절한 절차'(in due course)로 변경하자고 제안했다. 루스벨트와 장제스는 이를 받아들였다.

 

처칠은 한국의 독립 결의가 인도의 독립 문제와 연관될 수 있는 점을 우려했다.

 

이 때문에 처칠이 한국의 독립에 소극적이었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카이로선언이 발표된 지 70년이 됐지만 이를 둘러싼 연구와 논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특히 선언에 담긴 '적절한 절차' 문구는 남북 분단과 갈등의 배경이 됐다. 한반도의 독립 시기를 무한정 늦추기 위한 구실이 됐다는 지적도 있다.

 

카이로선언이 발표되기 전에 '김구·이승만 기여설' 논쟁도 불거졌다.

 

김구 기여설의 근거로는 김구가 카이로 회담을 앞둔 1943년 7월 26일 장제스를 만난 자리에서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한국 임시정부의 요구를 지지·관철해달라고 요청한 점이 꼽힌다.

 

일부 학계에서는 이승만이 미국 여론을 바꿔놓는 외교·홍보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친 결과 카이로에서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는 발표가 나왔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미국과 중국 등이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과 강대국의 이해관계를 고려해 한국의 독립을 바랐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당시 이승만은 루스벨트와 미국 국무부에 서한을 보내 '적절한 절차'의 구체적인 의미를 밝혀달라고 요청했으나 아무런 회신을 받지 못했다.

 

이는 루스벨트가 한반도를 바로 독립시키기 전에 일정기간 한국의 신탁통치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중국 문서에 따르면 장제스 측도 한반도 주변 4대 강국을 거론하며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 한국의 독립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등 한국 독립에 전략적 판단을 개입시켰다.

 

한편, 주이집트 한국대사관은 1943년 당시 실무진 회담 본부로 이용된 카이로 외곽의 메나하우스 호텔에서 오는 27일 '제70주년 카이로선언기념 학술대회'를 연다.

 

김영소 주이집트 한국대사는 "한국 대표가 참여하지 않은 회담이지만 카이로선언은 한국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역사적 사건"이라면서 "그 의미를 재조명하는 작업이 소홀이 돼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gogo213@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2013/11/22 10:00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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