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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교사 유일하게 개교, 부산에서 국가고시 2관왕 배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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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란 1951년 부산 피난 시기, 구덕산 기슭에 자리잡은 판자 가교사와 당시 재학생들
(사진제공: 건국대학교)


  건국대학교 박물관은 23일 1951년 6.25 전쟁 당시 피난지 부산 서대신동 구덕산 자락에 자리잡은 판자로 된 임시 가교사와 당시 재학생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발굴, 공개했다. 6.25 전쟁 당시 각 대학들은 재정면이나 운영면에서 독립된 경영을 할 수 없어 부산에서 정부 지원으로 이른바 ‘전시연합대학’(戰時聯合大學)으로 운영됐으나 건국대는 이 전시연합대학에 참여하지 않고 독자적인 단독 교사를 마련해 문을 열고 수업을 한 유일한 대학이었다. 1951년 9월 당시 정치외교학과와 경제학과 2개 학과에 입학생이 18명, 재학생이 172명이었다.

올해 학원창립 85주년·개교 70주년을 맞은 건국대학교(총장 송희영)는 6.25 전란 중에도 피난지인 부산에서 독립된 대학으로 문을 열고 수업을 진행했다. 1946년 조선정치학관으로 개교, 1949년 정치대학으로 이름을 바꾼 건국대는 6.25 전란 중인 1951년 피난지 부산 서대신동에 임시 가교사를 마련하고 학교의 문을 열었다.

당시 각 대학들은 재정면이나 운영면에서 독립된 경영을 할 수 없었던 형편이어서 부산에서 서울대를 중심으로 이른바 ‘전시연합대학’(戰時聯合大學)을 구성했는데 건국대는 이 전시연합대학에 참여하지 않고 독자적인 단독 교사를 마련하고 강의를 시작한 유일한 대학이었다. 문교부 기록에 따르면 1951년 당시 전시연합대학 등록학생은 총 6,455명, 부산에서 처음 강의를 시작할 당시 건국대 입학생은 18명, 재학생은 172명이었다.

당시 ‘전시연합대학’은 합동 강의형식을 진행했으며 각 대학의 학생들은 원적의 학교 소속은 유지한 채, 국가에서 비용을 지원하는 서울대를 중심으로 모여 합동으로 강의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각 단과대학에 각기 다른 대학의 학생들이 모여 혼합반을 이루었다. 그러나 건국대 설립자 상허 유석창 박사는 단독강의의 결의를 굳게 하며 1951년 9월 부산 서대신동에 정치대학의 간판 아래 임시 교사를 마련하고, 피난 온 학생들을 소집해 다시 수업을 시작했다. 피난지에서 독자적 운영을 한 대학으로는 유일했다. 부산까지 온전히 갖고 온 학적부와 피난상황의 악조건을 오히려 발전의 발판으로 삼고자 했던 설립자의 의지가 담겨있었다.

건국대의 부산 임시 교사의 역사는 송두용 선생의 역할이 컸다. 1950년 6. 25전쟁 발발과 함께 북한군이 서울을 점거한 직후부터 학교의 기능은 거의 정지 상태였다. 정치대학의 초대 학장으로 당시 국회의원 신분이었던 오하영(吳夏英) 선생을 비롯한 직원 10여 명이 납북 또는 행방불명됐다. 다행히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낙원동 교사가 피해를 입지 않았고, 학교와 재단의 각종 서류가 잘 보존되었다. 1950년 12월 19일 교무 직을 맡고 있던 송두용 선생은 학교의 중요 서류, 특히 학적부 일체를 고리짝에 넣고 무개차를 이용해 서울을 출발해 대구를 거쳐 51년 3월 5일 부산으로 옮겼다. 3월 중순 서대신동 1가 60번지 친척집에 ‘정치대학 부산연락사무소’를 설치했고 8월 상허 선생도 부산으로 내려와 합류하면서 개강준비를 본격화 했다.

1951년 당시 치열한 전투로 대부분의 남학생들이 입대하고 소수의 학생만 후방요원으로 남아 있었다. 당시 전시연합대학은 5월4일 제정된 ‘대학교육에 관한 전시특별조치령’에 따라 재학하였던 대학의 학적을 유지한 채, 국가에서 운영하는 전시연합대학에서 혼합수업을 받았다. 당시 문교부는 “전쟁으로 인하여 정상적인 수업을 실시할 수 없는 대학의 학생은 그 기간 중 타대학에서 수업을 받을 수 있다. 단독으로 수업을 실시할 수 없는 대학은 정상수업이 가능할 때까지 전시연합대학의 명칭으로 문교부장관의 승인을 얻어 합동수업을 실시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1951년 12월 23일 문교부 발표에서는 전시연합대학 등록학생을 총 6,455명으로 집계됐다.

건국대는 그러나 독립된 별도 대학으로 운영하기로 하고 개강에 필요한 제반 절차를 마무리한 끝에, 1951년 9월 서대신동 피난민 국민학교에서 강의를 재개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서대신동에는 불에 탄 부산형무소 관사 자리에 세워진 피난민 국민학교가 있었는데, 여기에 피난지 최초의 가교사 3개 동을 얻을 수 있었다. 국민학교 측에 군용 대형 천막 3개를 사주고, 그 대신 국민학교 수업이 끝난 후인 오후 6시부터 6∼7평짜리 판자집 교실 3개를 빌려 사용하게 됐다.

반년여 동안의 피난민 국민학교 교사를 사용하던 시기에는 오후 6시에 시작하여 80분 간 3강좌를 강의했다. 학과는 정치외교학과와 경제학과 2개였다. 그러다가 1951년 12월 21일 개편 인가를 받아 법학과·행정학과·정외과·경제학과 4개로 증편됐다.

건국대학교가 1951년 9월 부산에서 처음 강의를 시작할 때는 입학생이 18명, 재학생이 172명이었다. 재학생의 대부분은 서울에서 다니던 학생들이 아니라, 피난지 부산에서 새로 들어온 학생들이었다. 이처럼 야간에 강의를 하게 됨에 따라, 직장을 가진 재학생과, 또 직장에 다니며 학교에 나가 공부하고자 하는 신입생들이 정치대학을 찾았다. 한 학기 후에는 학생 수가 400∼500여명에 달했다.

학교의 경영은 교수·직원·학생 할 것 없이, 모두가 일체감을 가지고 가족적 분위기로 함께 이루어 나갔다. 교수진은 대부분 부산에 와서 재편성되고 그 전에 서울에서 재직하던 분은 거의 없었다. 1951년 10월 1일로 송두용 선생과 원용명 선생이 각각 전임강사와 교수로 임명됨으로써 처음으로 전임교수가 임용됐다. 건국대 1회 졸업생인 유덕산 원로동문은 회고록 ‘건국대학교 흘러간 반세기’에서 “이는 학교 운영진의 용기 있는 빠른 판단 때문이었다. 정치대학을 위하여, 그리고 정치대학의 명예를 위하여, 독립과 자존심을 지키려 했던 학교 운영진의 자존심과 독립운동가의 기질이, 이러한 어려운 결단을 이루어내게 한 것”이라고 회고했다.

이듬해인 1952년 4월 서대신동 구덕산 기슭에 본격적인 가교사를 건설했다. 구덕산 기슭의 가교사로 이전한 이후, 학생 수가 1,000여명으로 증가했다. 학생 수가 급증한 것은 전시 상황이 다소 완화되면서 학생들에게 징집(徵集) 보류제도가 실시된 데 따른 것이었다. 대학생에 대한 징집 보류 조처로 인해 고등학교 졸업반에 재학 중이던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여 공부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피난민 국민학교를 이용한 임시교사를 거쳐 구덕산 기슭 판자식 가교사에 이르기까지 부산에서의 야간대학의 운영은 발전을 거듭해 1952년 4월 5일에는 부산시청 앞에 있는 ‘부민관’이라는 극장을 빌려 정치대학 제1회 졸업식을 거행하게 됐다. 졸업생은 148명이었다. 졸업생 중에는 서울 시기부터 다닌 학생도 일부 있었으나, 대다수가 부산에서 입학한 학생들이었다. 졸업생의 구성도 다양해 나이가 많은 학생도 많았고, 대부분 다양한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이 같은 피난생활의 역경 속에서 이상규(李尙圭, 법학과 2) 동문이 1952년 12월 시행된 제3회 고등고시 행정과(行政科)에 합격하는 쾌거를 거둠으로써, 전쟁과 피난생활의 수난과 고생에 움추려 있던 건국가족에게 큰 기쁨과 희망을 안겨주었다. 이 시험에는 허선간(許善杆, 학부 1회 졸업) 동문도 행정과에 합격하였고, 박규석(朴圭錫, 전문부 정치과 졸업) 동문은 사법과에 합격했다. 이상규 동문은 이듬해(1953년) 실시된 제4회 고등고시 사법과(司法科) 시험에도 합격함으로써, 건국대의 이름을 전국에 떨쳤다. 부산에서의 정치대학은 확고한 지반을 구축한 셈이었다.

전쟁 중 피난지라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자력갱생의 노력을 펼치고 있던 중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되자, 정치대학도 1년 전에 어렵게 마련한 가교사를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그날이 바로 1953년 8월 20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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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부산 피난시기 정치대학 제1회 졸업생들의 사인
(사진제공: 건국대학교)


상허 선생은 종로 2가의 민중병원에 ‘정치대학 서울분교’를 설치하고, 20여 명의 학생을 기반으로 개강을 서둘렀다. 당시 낙원동의 정치대학의 교사(校舍)는 101헌병대가 징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101헌병대가 철수함에 따라, 8월 27일 정치대학은 2년 9개월 만에 낙원동 교사로 복귀했다. 볼품 없는 천막교사 등 열악한 환경에서 유석창 박사를 중심으로 어려움을 헤쳐나간 이 시기는 건국학원의 정체성이 싹트던 시기였고, 설립자의 리더십이 확립되는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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