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은 얼마나 악랄하며 무지한가?
사기꾼은 원래 교묘하고 악랄하다. 그런데 사기꾼들은 대게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가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사기꾼이 되는 것이고 사기치는 것이라고나 할까? 사기꾼은 절대 자신의 문제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들에게 사기를 치지 못한다. 꼭 모르는 사람에게 사기를 친다. 그래서 사기는 매우 악랄하고 비열한 범죄이기도 하다. 사기꾼에게는 심리적인 문제도 작동한다. 요즈음 SNS가 발전하면서 종전에는 없던 심리문제도 사회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리플리 증후군’도 그렇고 소위 ‘있어빌리티 욕구’가 투영된 ‘허언증’도 매우 심각하다. 조영남 사건에서 조영남이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조씨도 일종의 여러 욕구가 잘못 결합되어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라고 한 심리 전문가는 지적했다.
본보는 이번 사건에서 조영남을 악의적으로 인신공격하려는 의도는 전혀없다. 하지만 그의 행위가 얼마나 악랄하게 잘못되었고 무지한지 그가 일으킨 사태에 대해 그도 우리사회의 일원으로써 반드시 책임질 부분은 책임져야 한다는 점에서 좀 짚어 주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특히 미술계의 땀흘리는 진실한 예술가들과 건전하게 발전해야될 미술시장, 자라나는 미래 글로벌 한국미술의 인재들을 위해서도 더욱 그렇다.
마침 모언론을 통해 이 문제에 핵심적이고 구체적인 한 미술 전문가의 의견이 보도되어 본보도 이를 독자들에게 소개하기로 하였다. 국민들은 이번 사건에서 조씨의 행위가 '사기'라고 보는 견해가 70%를 넘었고 '관행'이다라는 견해에 나머지 동조하고 있다. 물론 이와 상관없이 법적책임 문제는 검찰의 수사로부터 진행될 것이다. 조씨가 이번 사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이며 그가 사기꾼인가 아닌가는 전적으로 그에게도 달려있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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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남이 무시한 회화의 오래된 진실 -
"회화에서 손과 정신의 이분법이라니…작품은 10만원이 간절한 무명화가의 것일 뿐"
글쓴이 : 심상용 동덕여대 예술대학 큐레이터학과 교수.
개념미술가 솔르윗(Sol LeWitte)은 한국 땅을 밟지도 않은 채 한국의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지는 것이 가능했다. 한국 갤러리에 펙스로 아이디어와 작업지시서가 담긴 에스키스를 전달하는 것으로 작가로서 그의 임무는 이미 완료되었기 때문이다.
미국 팝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1928~1987년)의 실크스크린 작품인 '꽃'. 워홀은 그의 스튜디오인(팩토리)에서 조수들과 함께 작품을 만들었다.
하지만 회화는 개념미술이 아니다. 개념미술이 1970년대의 산물인 반면 회화는 인류의 기원과 맞닿아 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건 현대적인 의미에서건, 회화에서는 첫 스케치부터 마지막 완성에 이르기까지 붓질 하나하나가 그림 전체만큼이나 중요하다.
조수의 도움이 물리적인 부분에 국한된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하지만 그 자체가 이미 개념주의에 감염된 사유의 산물이다. 회화에 대해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렇게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회화작업에 ‘진지하게’ 임한 경험이 있거나 임하고 있는 사람들은 진실에 대해 알고 있다. 안료를 흥건히 묻힌 붓이 캔버스와 접촉하는 과정에 돌입하는 순간 물질적 차원과 아이디어의 이분법은 이미 아무런 의미가 없다.
손과 정신의 이분법은 여기서 가당치 않다. 기술과 노동, 감성과 인식은 씨실과 날실처럼 서로를 밀치고 끌어당긴다. 그러한 과정의 내밀함과 치열함, 어긋남과 일치의 밀도있는 반복에 의해 회화는 조금씩 주인을 닮아간다. 그리고 공감의 공간이 아주 조금씩 확장되어나간다. 미적 수준은 그것의 한 부수적인 성과에 지나지 않는다.
존경받아 마땅한 회화, 보는 이를 그 앞에 묶어두는 그림은 대체로 그렇게 만들어진다. 마땅히 조영남의 회화도 그렇게 만들어졌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작은 붓질 하나, 실수로 튄 안료 한 방울에 이르기까지 주인의 땀과 눈물, 고통과 환희, 지적 분출이자 마음의 고백을 담은 것이어야 했다. 그런데 무엇보다 조영남의 그림이 상당히 표현적이기에, 붓질들엔 변화무쌍하고 근육의 고유한 작용이 미세하게 반영되어 있기에, 더더욱 그래야만 했었을 그것의 90% 이상이 익명의 A씨에 의해 수행됐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 그림에 담겨져 있으리라고 믿었던 조영남의 내밀한 것들이 그림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불규칙하고 진동하는 듯한 터치들은 10만원이 간절하게 필요했던 무명화가의 것일 뿐이다. 여기서 조영남은 소액을 제공한 대가로 수천만 원에 팔릴지도 모를 대작을 획득하는 기지를 발휘하는 인간으로서 등장할 뿐이다. 대필된 터치, 대행된 채색으로 자신을 대변하는 기만보다 그것으로 얻을 수 있는 비예술적 혜택에 더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으로서 말이다.
이러한 진술을 과도한 것으로 만드는 '관행'이라는 것의 존재에 대해 모르지 않는다. 조영남은 그 관행으로 자신의 마지막 정당성을 주장한다. 하지만 자신이 쓴 책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에서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려야 하지 않을까? “우리 쪽에선 예술 한답시고 얼마나 거들먹거렸는가. 예술이 무슨 권력이나 되는 것처럼 얼마나 착각해 왔는가” 그래서 그가 아웃사이더를 자처하며 화투장을 들고 나왔을 때, 그가 말했던 것이 미술계의 관행이었던가?
조영남의 그림? '가족여행'
미술계의 관행에 대해 한마디 하겠다. 카미유 코로(Jean Baptiste Camille Corot)는 다른 화가의 그림에 숱하게 사인을 해준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경험했던 가난을 그 화가만큼은 면하기를 바랐던 코로의 순결한 동정심 때문이었다. 그는 자주 이용당했지만, 결코 남을 이용하지는 않았다. 앤디 워홀의 '팩토리'(공장)는 어떤가. 많은 조수와 동료들이 작업에 동참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술생산을 아메리카화한다는 개념의 산물이었다. 워홀의 공동 작업은 관행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깨는 것이었다.
제프 쿤스의 아틀리에에선 127명의 어시스턴트들이 작품제작에 관여하고 있다. 세계 미술 시장이 돌아가는 방식이다. 한 작가를 프로모션해 브랜드화하고, 욕망의 조작에 나서고, 페어와 옥션으로 구성된 지구촌 비즈니스망을 통해 대대적인 판매에 나서는 것이다. 헤지펀드들의 자본이 몰리고, 부의 거대한 이동이 일어나고, 투기 붐이 조성되고, 누군가는 정말이지 큰돈을 번다.
이것이 현대미술의 초자본주의적 작동방식이다. 현대미술의 많은 가담자들이 이 길을 따르고 싶어하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길이 매우 위험한 길이라는 것만큼은 알아두시길! 그리고 관행을 어떤 실수에도 온정을 베푸는 관용주의의 도구로 삼아선 안 된다. 관행 안에는 또 다시 다양한 유형들이 존재한다. 어떤 관행을 따를 것인가는 여전히 선택의 문제다.
심상용 동덕여대 예술대학 큐레이터학과 교수. : 심 교수는 1961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1985, 88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과 동대학원에서 각각 회화와 서양화를 전공했다. 1989년 도불해 파리 8대학에서 조형예술학으로 석사와 D.E.A.(박사 전 학위)를, 파리 1대학에서 미술사학으로 박사학위(1994)를 취득했다. 저서로 『아트 버블』(2015.리슨투더시티), 『예술, 상처를 말하다』(2011.시공사), 『시장미술의 탄생』(2010.아트북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