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 ‘화평법’대로라면 제2의 옥시사태 막지 못한다
정부가 유해화학물질로부터 국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제정한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에 관한 법률(화평법)’이 지나치게 느슨한 등록 기준으로 인해 사실상 무력화됐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기업의 편의만 좇아 누더기가 된 현재의 화평법으로는 국민안전이 거의 무방비로 뚫려 있는 상태다. 이대로라면 제2, 제3의 가습기 살균제 참사도 가능한 구조로 보인다.
화평법에서 전문가들과 환경단체들이 가장 문제가 크다고 지적하는 부분은 신규 소량 화학물질의 등록기준을 연간 1t으로 잡은 것이다. 이 법에 따라 환경부는 연간 1t 미만으로 화학물질을 수입, 제조, 판매하는 경우 독성시험자료 등의 제출을 생략하고 신청자정보, 식별정보, 용도, 노출정보 등 간단한 정보들만 제출하도록 하고 있다. 환경부는 사람의 건강 또는 환경에 심각한 피해를 줄 우려가 크다고 인정돼 환경부 장관이 지정·고시한 화학물질은 제조량·수입량이 연간 1t 미만이더라도 등록하도록 안전장치가 마련돼 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가습기 살균제가 유통되던 시기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 등 독성물질은 유해성 확인이 이뤄지지 않은 채 유통된 전례가 있다. 특히 생활화학제품에 사용되는 살생물제의 함량이 극히 미량이기 때문에 연간 1t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양을 사용하고도 생활화학제품을 양산하는 것이 가능한 것도 문제다. 독성물질 전문가들과 화학물질 제조·수입업계 내 전문가들에 따르면 옥시레킷벤키저가 2001~2011년 판매한 옥시싹싹에 사용된 독성물질 PHMG의 연간 사용량은 300㎏ 정도에 불과하다.
옥시싹싹 한 병의 용량은 550㎖로 PHMG 성분은 물과 섞은 25% 희석액이 전체 용량의 0.5%인 2.75㎖씩 함유됐다. 옥시싹싹이 연간 41만병가량 판매되었다고 가정할 경우 실제 사용된 PHMG의 양은 1127.5㎏의 4분의 1인 281.9㎏가량에 그치는 셈이다. 화평법 기준으로 보면 옥시싹싹의 PHMG는 여전히 환경부에 간단한 기본정보만 제출하고도 사용할 수 있는 물질이 되는 것이다. 2015년 1월 화평법 시행 이후부터 연간 1t 이상으로 제조·수입 사실을 등록한 화학물질 건수와 1t 미만으로 간이등록한 건수, 실험용·연구용 등으로 등록이 면제된 건수를 비교해보면 화평법의 그물이 얼마나 성긴지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한 야당의원이 환경부로부터 제출받은 2015년 1월부터 지난달 사이 화학물질 등록·면제 건수에 따르면 연간 1t 이상 수입·제조하면서 용도, 양, 독성시험 등 정보를 환경부에 제출한 건수는 49건에 불과했다. 이는 환경부가 파악한 전체 화학물질 수입·제조 건수인 4만4640건의 0.001%에 불과한 수치다. 연구용, 과학실험용이라는 이유로 아예 등록 의무가 면제된 건수는 전체의 92.4%인 4만1256건에 달했다
전문가들은 연구용, 과학실험용으로 신규 화학물질을 수입하거나 제조하는 경우 등록 의무를 면제하는 것에 대해 악용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세퓨를 제조한 버터플라이이펙트사가 덴마크 케톡스사로부터 40㎏ 미만의 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PGH)을 농업용 샘플 용도로 수입해 이를 가습기 살균제에 사용한 사실도 최근 드러났다. 옥시싹싹에 함유된 PHMG 양을 산출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계산하면 40㎏은 1만6000병의 가습기 살균제 제품을 만들 수 있는 양에 해당한다.
2013년 화평법 제정 당시부터 전문가들과 기업, 환경단체, 정치권에서는 소량의 신규 화학물질 기준을 놓고 논란이 거듭된 바 있다. 1t으로 기준을 설정할 경우 생활화학제품에 사용되는 살생물제에 대해서는 관리가 어려워진다는 우려가 지배적이었지만 대통령까지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며 화평법을 공격했고,
기준은 결국 1t으로 정해졌다. 2013년 국회 법안 심사 과정에서 심상정 의원(정의당) 등이 기존 유해화학물질관리법상 화학물질 등록 면제 기준인 연간 0.1t을 기준으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기업활동 위축을 명분으로 삼은 산업통상자원부의 끈질긴 반대로 결국 등록 기준은 1t으로 결정됐다. 환경안전건강연구의 한 전문가는 “제2의 가습기 살균제 피해를 방지하려면 양에 상관없이 필수적인 자료들을 요구하고, 위해성평가 보고서 초안을 산업체가 작성하도록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 살생물제 관리를 위한 별도 법안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권맑은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