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가치가 무의미해진 국회, 헌정사상 초유의 입법비상사태 발생
2015년 12월 31일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와 전쟁을 치르는 것도 아니다. 국민 모두가 고통으로 얼룩지는 천재지변이 갑자기 일어난 것도 아니고 IMF구제금융 시절처럼 나라 경제가 갑자기 파탄난 것도 아니다. 그런데 2016년 병신년 1월1일을 맞는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평온한 가운데 심각한 ‘국가비상사태’를 맞이했다. 국민이 잘못했나? 아니다. 대통령과 행정부가 잘못했나? 아니다. 그럼 사법부가 잘못했나? 그것도 아니다.
그럼 북한이나 이웃나라가 대한민국을 침탈했나?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헌정사상 초유의 비상사태를 맞았다. 모든 잘못은 입법부 즉 국회가 이 상황을 만들었다. 결국, 국민들만 피해를 보게 되었다. 국민책임이다. 그런데 도대체 이 상황에 국민들이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다. 있다면 저 국가비상사태(입법비상사태)를 만든 여의도 식충이들을 잘못 뽑은 죄 뿐이다. 국민들은 저 국민혈세만 삼키며 제 할일도 못하는 무능한 국회를 어찌해야 한다는 말인가?
2015년 마지막 본회의가 종료된 가운데 내년 20대 국회의원총선거에 적용될 선거구 획정 협상이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정의화 국회의장과 여야 중진의원들이 '대표전권협상'을 제안하는 등 막판타결 노력을 촉구했지만, 새누리당이 선거구 획정과 노동5법 등 쟁점법안을 함께 내년에 처리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게끔 야당은 한 발자욱도 협력하지 않았다. 여야의 협상 자체가 이뤄지지 못했다.
헌법재판소는 이미 지난 2014년 10월에 국회의원선거구별 인구편차 허용한계를 기존 3:1에서 2:1로 변경하라는 입법개정을 주문하며 현행 선거구의 효력이 올해 말까지만 유지되도록 결정했었다. 도대체 그 길고 충분한 시간 동안 국회는 무엇을 했다는 말인가? 이것은 직무유기다. 따라서 이제 2016년 1월1일 0시를 기해 현재 국민의 선거구는 법적 효력을 잃는다. 앞서 정의화 국회의장은 여야 4선이상 중진의원 회동과 대표 회동을 잇달아 가지며, 여야가 선거구 획정 타결을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해줄 것을 촉구했다.
여야 중진들도 양당의 협상 대표에게 20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적용될 선거구 획정 협상의 전권을 위임하는 방안을 각 당에 제안키로 했다. 당의 전권을 위임받은 대표가 협상에 임하고, 여기에서 나온 결과에 (당 대표나 그외 대표급 인사)가 협상에 임하도록 하자는 제안이었다. 국회는 오후 5시20분께 양당의 요청으로 본회의를 정회했으며, 양당은 각각 회의를 열어 전권협상 여부를 논의했다. 새누리당은 김무성 대표, 원유철 원내대표, 서청원·이인제 최고위원·김정훈 정책위의장·조원진 원내수석부대표 등이 참여하는 긴급 최고위원회와 의원총회를 잇달아 개최했고, 새정치연합은 문재인 대표와 이종걸 원내대표, 정개특위 간사인 김태년 의원이 모여 회의를 가졌다.
하지만 새누리당이 선거구 획정과 쟁점 법안을 함께 처리해야 한다는 원칙을 재차 확인할수 밖에 없었고, 사실상 대표전권협상을 거부하게 되었다. 원유철 원내대표는 최고위원회의 후 정 의장을 만나 이같은 의견을 전달한 후 기자들에게 "우리는 그간 경제를 살리고 민생을 살리기 위한 민생경제법안, 노동5법, 국민들의 안전을 위한 법안을 임시국회에서 처리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며 "국회의원 선거구만 획정해서 끝나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원 원내대표는 오후 기자들에게 "선거구 관련 논의가 오늘 더이상 없느냐"는 질문에 "더이상 없다"고 답했다. 이어 "의총에서 쟁점법안 처리가 없이는 선거구 획정안 처리도 없다는 각오를 다졌다"고 덧붙였다.
선거구 획정 막판협상이 무산되면서 정의화 의장은 1일 0시를 기해 지역구 의석 '246석'을 기준으로 한 기본기준을 선거구획정위에 제시키로 했으며, 신년 1월 초 직권상정을 시도할 계획 예정이다. 이에 총선 예비후보들은 현역 의원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여야의 밥그릇 싸움에 희생됐다며 강력 반발하는 등 총선 판도에 혼란이 가중되는 형국이다.
정치권 허송세월 1년 2개월
정 의장은 31일 국회에서 기자들에게 “내일부터는 입법 비상사태가 되기 때문에 0시를 기해 선관위에 내가 준비한 기준을 전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정 의장은 여야 모두 반발이 상대적으로 적은 ‘지역구 246석ㆍ비례대표 54석’ 기준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 의장이 직권상정이라는 초강수를 둔 것은 ‘2015년 12월 31일까지 선거구 간 인구 편차를 현행 3대1에서 2대1로 조정해야 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 기존 선거구는 무효화된다’는 헌법재판소 결정(지난해 10월)을 국회가 끝내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등록한 총선 예비후보자들 자격상실, 신규후보 등록 불가능, 현역의원 존재가치 불법상태
이에 따라 새해 벽두부터 현행 선거구가 모두 무효가 되면서 지난 15일부터 등록을 시작한 내년 총선 예비후보자들의 자격이 상실되고 신규 후보 등록도 불가능해지는 등 대혼란이 벌어질 전망이다. 선관위는 일단 예비후보의 선거활동을 보장하기로 했지만 이것도 헌법이 인정할 수 없는 꼼수편법에 불과하다. 응당 정치신인들은 반발하고 있다. 이런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는 현역의원들의 기득권 지키기에서 비롯되었다. 다른 해석이 필요가 없다. 그 동안‘농어촌 의석은 단 한 석도 줄일 수 없고 비례대표제도 수정할 수 없다’는 여당과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주장하는 야당이 양보 없이 평행선을 달려왔기 때문이다.
여야는 헌재 결정 후 1년 2개월이란 시간을 허송세월 한 셈이다. 현역 의원들은 현행 선거구가 무효가 되더라도 지역 대표라는 자신들의 지위는 그대로 유지되고 미래 경쟁자인 예비후보들의 손발은 묶을 수 있기 때문에 현재의 혼란에 불리할 것이 하나도 없다. 이와 관련 서울 지역구에 출사표를 던진 한 예비후보는 “기한을 넘겨도 현역 의원들에게는 피해가 없으니 사실상 지역구가 없어져 자신들의 존재가치도 무의미한 상황인 대혼란을 오히려 즐기고 있는 것 아니냐”는 불만이 나오고 있다.
선출직인 의원들의 지역구가 없어지면 지역 대표성이 사라지게 된다. 이는 위법 상태가 되는 것이다. 지역구가 없어도 현역 의원들은 의정보고회 등 내년 총선 관련 활동은 할 수 있다. '국민의 대표'라는 지위도 변함은 없다. 하지만 국회의원 존립 근거 중 하나인 지역 대표성을 잃게 되고, 이는 국회의 법적 근거가 흔들리는 것을 의미한다. 국회의원이 권한을 위임받은 지역구와의 연결고리가 끊어지게 되면 의회 자체가 불법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상황이 된다.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새로 총선을 하기 전까지 의회의 존립 근거가 사라진 상황이다. 신년 1월 1일부터 국회가 법안 처리를 할 경우 위헌이나 무효를 주장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국회, 소송사태 직면할 우려 커
국회가 소송 사태에 직면할 것이라는 우려도 크다. 내년 총선에 출마하려는 예비 후보자들은 선거구가 없으면 예비 후보 등록을 못 하기 때문에 선거운동에 여러 제약을 받게 된다. 비록 중앙선관위가 올해 말까지 등록한 예비 후보자들의 선거운동 단속을 잠정 유보해 일부 선거운동이 가능하도록 했지만 현역과의 차별 문제는 여전히 남게 된다.
허영(헌법학) 경희대 석좌교수는 "예비 후보자들이 (현역과의 차별을 이유로) 국회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 행정소송 등 법적인 소송을 할 수 있는 결과가 발생할 것"이라고 했다. 또 내년 총선 결과에 대한 불복(不服) 소송이 줄을 잇는 상황이 초래될 수도 있다. 장영수(헌법학) 고려대 교수는 "선거구 무효 사태는 현역 의원에 비해 예비 후보자들이 불리한 상황을 초래하기 때문에 예비 후보자들이 이를 이유로 선거 무효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이렇게 될 경우 내년 총선 자체에 헌법과 헌정원칙 중 하나인 법적 안정성이 크게 흔들리게 된다.
이처럼 무법(無法)과 심각한 혼란이 예상되는 데도 여야가 선거구 획정에 합의하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이자 '탄핵감'이다. 허영 교수는 "국회가 31일까지 선거구 획정을 하지 않는다면 국회의원이 탄핵을 받아야 할 사안"이라며 "실정법에 없지만 국민소환 운동이라도 벌여야 한다"고 했다. 강원택 교수는 "선거구 획정을 하지 않는 것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여야의 담합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인들이 후안무치한 것"이라고 했다. 향후 같은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선거구 획정 권한을 국회의원이 행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선거구 획정 공은 다시 획정위로
정 의장이 0시를 기해 선관위에 기준을 제시하면서 선거구 획정의 공은 다시 국회의원선거구획정위원회로 넘어가게 됐다. 정 의장의 중재로 12월 들어서만 8차례 선거구 협상 회동을 했던 여야 지도부는 이날 오후 9번째로 다시 만났다. 이어 새누리당은 최고위원회의ㆍ의원총회, 더불어민주당은 지도부회의를 여는 등 선거구 획정 방안을 추가 논의했으나 이견 차를 좁히지 못했다.
12월 임시국회가 신년 1월8일에 종료하는 만큼 획정위가 4일쯤 획정안을 의결해 국회로 다시 넘기고 소관 상임위인 안전행정위원회 심의를 거쳐 8일 본회의에서 처리하는 것이 현재로선 그나마 유력한 시나리오다. 의장실 관계자는 “획정위원을 여야가 각각 4명씩 추천한 만큼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얻어 합의를 도출하기가 어렵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를 거부했을 경우 정치적 부담 때문에 부결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밝혔다.
‘246’안으로 국회의장 직권상정이 되더라도 지역구 축소가 불가피한 농어촌 의원들의 반발 등으로 본회의에서 부결될 수도 있다. 이럴 경우를 대비해 정의장 측은 여야가 그간 논의해온 ‘지역구 253석ㆍ비례대표 47석’을 또 다시 획정위에 넘기는 대안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미 낙제점수를 받은 국회다. 또 졸속 벼락치기 라도 해야 하는가? 국민들은 말하고 있다. “도대체 금뱉지들 왜 사는가? 국회의 존재가치가 무의미해졌다." 심지어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국가전복을 목적으로 하는 반국가적 좌파도 아니다. 오죽하면 그가 이렇게 말했을까? "차라리 무능 졸속국회, 해산하라!" 국민들은 이 사태를 국회 스스로의 ‘입법자살’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권맑은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