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한국전 첫 미군 포로 로버트 플래처 씨

posted Jul 26,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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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참전용사 로버트 플래처씨.

         "흑인 냉대에 울분 느꼈지만 한국 발전상 보고 보람 느껴"

 

(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미국 미시간주에 살던 17살의 앳된 흑인 청년 로버트 플래처 일병은 한국전쟁으로 바람 앞에 촛불 신세이던 한국(남한)을 위해 싸우며 청춘을 불살랐다.

 

미국 보병 24연대 소속으로 참전한 그는 물설고 낯선 땅에서 살기 위해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총을 난사해야만 했다.

 

낙동강 전투에서 북한군을 결사적으로 막아내는 데 공을 세우며 반격의 기회를 마련했지만 옆에서 쓰러져가던 전우와 적들의 눈망울을 기억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총성이 멎은 지 60년이 지난 지금, 팔순의 나이인 그는 여전히 미시간주 앤아버에 살고 있다. 그러나 휠체어에 의지하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고 아직도 전쟁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고통스러운 말년을 보내고 있다.

 

아픈 기억보다 요즘 플래처 씨를 괴롭히고 화나게 하는 일은 한국전 참전 흑인 용사에 대한 인종 차별적 평가와 한인들의 시선이다.

 

그는 24일(현지시간) 동포신문인 '주간 미시간'과의 인터뷰에서 "흑인들로만 구성된 보병 24연대에 대한 평가는 인종적 차별로 얼룩져 있다"면서 "1997년 미국 육군 군사편찬소가 발행한 '검은 병사, 흰 군대'란 제목의 책자에는 그릇된 시각이 들어 있다"고 불만을 표출했다.

 

이 책에는 보병 24연대가 당시 다른 부대만큼 잘 싸웠지만 '군기 해이' 등으로 미 8군 소속 다른 부대들에 비해 현저히 뒤떨어진 군대로 묘사돼 있다는 것이다.

 

플래처 씨는 "흑인 보병연대는 가장 위험한 전투에 투입됐고 가장 열악한 상황에서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고 술회하면서 "하지만 우리의 활약상을 말하는 이는 아무도 없으며 미국의 언론조차도 우리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고 울분을 토했다.

 

그는 인천 상륙작전으로 서울을 수복하고 압록강까지 밀어붙인 연합군의 일원이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고전하던 24연대는 그해 11월 27일 알지도 못하는 산골짜기에서 중공군에게 완전히 포위돼 5일 동안 굶으며 싸웠다.

 

"실탄도 다 떨어지고, 더 이상 싸울 기력도 남지 않았어요. 게다가 살을 에는 듯한 영하의 추위는 견딜 수 없었지요. 우리에게는 겨울 군복과 군화도 지급되지 않아 모두가 동상에 걸려 살이 썩어들어갔죠. 더 싸우다 죽을 것인가, 아니면 항복할 것인가. 의견이 분분했지만 투항하기로 결정했습니다. 250명 가운데 139명이 생포됐고, 나머지는 모두 전사했습니다."

 

생포 당시 왼쪽 발목이 부러진 플래처 씨는 그후로 33개월 동안 포로 생활을 했다. 어디로 잡혀갔는지도 모르지만 중공군의 포로 학대는 극에 달했다고 그는 증언했다.

 

그는 1953년 8월 8일 남북 포로 교환으로 석방되고 뒤늦게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발목 부상을 방치해 생긴 후유증으로 5번이나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오랫동안 악몽에 시달렸어요. 밤에 자다가 소스라쳐 깨어나면 아내가 등을 토닥거려 주었죠. 진정제 없이는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흑인들에게는 참전용사에게 주어지는 군인연금 지급이 지연됐죠. 퇴역한 지 30년이 지나서야 연금을 주기 시작했어요. 퇴역 즉시 연금을 수령한 백인들과는 너무도 달라 억울했습니다."

 

시 공무원으로 근무하다가 62살에 은퇴한 그는 여러 차례 자살을 기도했다. 일을 할 때는 잘 몰랐는데 은퇴하고 시간이 남자 한국전의 악몽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잊고 싶던 과거의 아픔이 또렷해지면서 정신적으로 견딜 수 없게 되자 삶을 포기하려 했던 것이다.

 

그는 미시간주에 사는 한인들의 태도에도 화가 나 있었다. 한인들이 백인 참전용사에 비해 흑인 용사를 대하는 것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우리를 무조건 피하고 무시하는 태도였어요. 저런 사람들을 위해 싸웠나 하는 자괴감마저 들었죠. 당시 사건 발생 건수로 보면 백인 병사의 강간이 훨씬 많았지만 한국 여성들은 흑인에게 더 많은 피해의식을 갖고 있었어요. 그래선지 미시간에 돌아온 이후에도 한인들로부터 무시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한인들에 대한 서운한 마음도 2000년 자비를 들여 한국을 재방문하면서 눈 녹듯 사그라들었다.

 

"감격의 눈물을 흘렸어요. 보고 있는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어요. 젊음과 생명을 바친 희생의 결과가 이렇게 멋진 것이라는 점에 눈물이 났어요. 제 과거를 보람차게 만들어준 한국 사람들이 고맙습니다."

 

그는 지금도 한국인들에게 한국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흑인 병사들도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부탁한다.

 

플래처 씨는 미국 국방부가 정전기념일을 앞두고 참전용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여는 행사에 초청돼 24일 워싱턴DC에 갔다. 한국전 최초의 미군 포로였던 그는 현재 전미참전용사회에서 전쟁포로회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흑인 참전용사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앞장서는 그는 "전쟁을 하면 모두가 패자가 될 수밖에 없다"며 "한반도에서 다시는 6·25와 같은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ghwang@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2013/07/25 11:42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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