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은나라 썩은교육 <사외칼럼>
北 맹신한 삶이 아이들에게 교훈 준다니…
이옥진,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2010년 출간된 '나는 공산주의자다'(출판사 보리)는 남파 간첩 출신 비전향 장기수의 이야기를 만화로 그린 책이다. 허영철(1920~2010)이 2006년 펴낸 자전적 에세이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를 원작으로 한 이 책은 올해 2월 '어느 혁명가의 삶'이란 제목으로 재출간됐다. 사상 전향을 거부하고 36년을 교도소에서 보낸 허영철의 유고집(遺稿集)인 것이다.
허씨를 주인공으로 한 책이 초등학교 고학년 대상 추천 도서다. 지난해 경기도교육청 산하 경기디지털자료실지원센터에서 초등학생 추천 도서로 선정했고, 현재 경기도 70여개 초등학교 도서관에 비치됐다. 일부 자유주의 단체에서는 '초등학생에게 좌편향적 역사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고 문제 삼고 있다. 도대체 어떤 내용 때문에 초등학생 추천 도서가 됐을까?
이 책은 조선노동당에 대한 헌신적 믿음으로 평생을 살아온 허씨의 삶을 그리고 있다. 1920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난 그는 광복 뒤 남로당에 입당했다. 6·25전쟁이 일어난 뒤 지역 인민위원회 간부로 활동했고, 공작원 교육을 받고 1954년 간첩으로 남파됐다. 그 이듬해 대한민국 당국에 체포돼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나이 35세였다. 그 뒤 정부와 가족의 전향 권유를 거부하고 36년을 교도소에서 보낸 그는 1991년 출소했다. 그는 2010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허씨가 출소한 뒤 펴낸 원작을 바탕으로 쓴 이 책에서 허씨는 '미국놈들이 우리 역사에서 필요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하는 등 미국을 제국주의 세력으로 규정했다. 반면 '사회주의 국가 중 북조선은 상당히 민주적인 편'이며 '인민의 당에 대한 신뢰도는 거의 절대적'이고 '전쟁(6·25)이 나고 미군이 쳐들어오자 당원들이 모두 나서서 싸우는 모습을 보고 인민이 당을 믿게 됐다'며 조선노동당이 지배하는 세상을 이상향으로 봤다.
6·25 당시 죽을 고비를 넘길 때 '내가 만약 죽더라도 조선노동당 강령을 실천하다 죽은 것이니 가치 있는 죽음이라 생각했다'고 했을 정도로 조선노동당에 대한 허씨의 믿음은 절대적이었다. 1991년 교도소를 나와서도 그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는 북조선에서 이뤄진 것 같다'고 했다. 사회주의 동유럽이 무너지고 북한이 세기말적 수령 체제로 변질했는데도 허씨 머릿속의 북한은 늘 아름다웠다.
책을 덮을 때쯤 북한을 그토록 믿었던 허씨의 삶이 차라리 애달프게 느껴지도록 써놓았다. 그가 '민주주의의 이상향'이라 믿었던 북한에서 왕조 시대에나 가능했던 3대 세습이 이뤄지고, '3대 세습 폭군' 김정은이 인민은 물론 고모부와 측근까지도 짐승처럼 무자비하게 도륙하는 모습을 그가 살아서 봤다면 얼마나 허망할까?
평생을 허깨비에 속아 살아온 허씨의 삶만큼이나 황당한 건 초등학교 사서 교사 A가 디지털자료실지원센터 홈페이지에 남겨놓은 이 책의 추천 이유였다. '허씨가 36년을 감옥살이하면서도 자신의 사상이나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A씨는 "정치적 성향과 관계없이 한 시대를 살았던 할아버지의 일생을 다룬 책이라 추천한 것뿐"이라고 했다.
이 책에선 그가 이상향으로 꿈꿨던 당과 인민 간의 믿음을 찾아볼 수 없는 북한, 기아와 인권 유린에 시달리는 북한 인민, 역사가 입증한 사회주의의 실패에 대한 이야기는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2005년 대한민국 정부가 북한을 방문하게 해줬을 때 "(북한 사람들이) 어렵게 살아도 마음속에 미래에 대한 자신감이 있다는 걸 보고 왔다"고 했다.
신념은 자유다. 하지만 남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신념, 나아가 어린이들이 배우고 따를 만한 신념이 되려면 진실에 기반을 두고 추구할 만한 가치를 담아야 한다. 공산주의도 뭐도 아닌 엉망진창이 된 '북조선'에 대한 무오류적 믿음에 사로잡힌 허씨의 삶에서 초등학생들이 무엇을 배우고 느끼란 것인가? 지금 그들은 순진무구한 아이들에게 망했던 베트남을 가르치고 있다. 썩은나라는 망조교사, 썩은 교육으로 아이들을 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