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재복 대기자]
그동안 은둔하는 듯 지내온 박지만 이지(EG) 회장이 15일 오후 검찰청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통령의 '가신그룹'을 상징하는 정윤회씨가 불려나온 데 이어 '친인척'을 대표하는 박 회장까지 출석함으로써 이들 사이의 갈등·암투설이 검찰 조사를 통해 공론화된 셈이 됐다. 검찰은 먼저 박 회장이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 보고서 유출과 관련됐는지를 캐물었다.
박 회장이 '정윤회 국정개입 보고서'를 보도한 <세계일보> 기자를 만나
유출된 청와대 문건을 전달받은 뒤 정호성 청와대 제1부속비서관을 통해 조처를 취할 것을 요청한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그러나 박 회장이 자신이나
아내 서향희 변호사 등에 관한 100여쪽의 청와대 문건 유출 문제를 제기했는데도 정 비서관은 별다른 조처를 취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더구나 청와대는 오히려 지난달 28일
<세계일보> 보도로 문제가 불거진 뒤 감찰조사를 벌여 조응천 전 공직기강비서관을 중심으로 박 회장의 측근인 전아무개씨 등이 포함된
'7인회'가 보고서 유출에 책임이 있다고 결론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정윤회씨와 '청와대 문고리 3인방'(이재만·정호성·안봉근 비서관) 등
'가신그룹' 진영과 대척점에 서 있는 박 회장이 역시 이들과 갈등을 겪어온 조 전 비서관이나 '7인회'의 배후로 의심받는
상황이다.
박 회장의 출석은 청와대 보고서 유출과 관련된
것이지만, 세간의 관심은 박 회장과 정윤회씨의 '권력 암투'에 쏠려 있다. 검찰도 이 대목을 일부 조사했다. 마침 정씨의 박지만 미행 지시설을
다룬 <시사저널> 고소 사건이 검찰에 접수돼 있었기 때문이다. <시사저널>은 3월에 "정씨가 용역업체 직원을 시켜
오토바이로 박지만 회장을 미행하다 발각됐으며,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조사했다"고 보도했다. 정씨는 <시사저널> 기자 3명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박 회장이 피고소인은 아니지만 미행설의 실체를 밝힐 수 있는 당사자여서, 진실 규명을 위해서는 박 회장에 대한 조사가
불가피했다.
박 회장은 '청와대 보고서' 사건이 불거지기 전에는
미행설 보도와 관련한 검찰의 조사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씨는 언론 인터뷰에서 "<시사저널> 보도를 보고 이틀 뒤
박 회장 집으로 찾아갔다. '자술서를 보여 달라'고 하자 그때는 박 회장이 '보여주겠다'고 하더니 이후 연락을 끊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박 회장이 스스로 검찰에 나온 만큼 미행설 관련 자료를
검찰에 제출했을 가능성도 있다. <시사저널>은 박 회장이 자신을 미행한 사람을 붙잡아 '정윤회씨가 미행을 지시했다'는 자술서를 받아
뒀다고 보도한 바 있다. 미행설 수준을 넘어, 정씨나 '문고리 3인방'의 국정농단 의혹과 관련해 적극적으로 진술했을 수도 있다. 그동안 침묵하던
박 회장이 검찰에 나오겠다고 한 것이 이런 '반격'의 신호가 아니냐는 것이다.
정부, 공기업, 청와대 등의 인사와 관련해 정씨와 박 회장은 박근혜 정부 초기부터 각축을 벌여온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들어서만 이재수 전 기무사령관과 국정원 고위직 ㄱ씨, 조 전 비서관 등 박 회장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인사들이 줄줄이
자리에서 물러났는데, 이 과정에 정씨 등이 영향력을 행사한 것 아니냐는 말이 많았다. 특히 지난 10월 기무사령관이 임명 1년도 안 돼 전격
경질되자 뒷말이 무성했다. 이 전 사령관은 박 회장과 중앙고·육사(37기) 동기로, 두 사람은 절친한 관계로 알려져
있다.
올해 들어 공기업 인사 등에서도 박 회장 쪽 사람이 옷을
벗는 사례가 많았다고 알려져 있다. 두 세력 사이의 권력 암투는 '찌라시' 등을 통해 중계돼 왔고, 이에 '정윤회 국정개입 보고서' 수사가 결국
정씨와 박 회장 사이 진실공방으로 수렴될 것이라는 전망이 법조계에서 나돌았다. 두 사람 모두 차례로 검찰에 출석하면서 이런 전망은 현실화한
셈인데, 이제 남는 의문은 검찰에 출석하면서 박 회장이 언급한 "알고 있는 사실"이 무엇인지로 좁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