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재복 대기자]
"바르게 살자고는 하는데, 정작 무엇이 바르게 사는 것이냐 하는 문제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고 봐요. 그런데도 무작정 앞ㆍ뒤를 모두 자르고 바르게 살자고만 하니 웃음만 나오죠."
3일 오후 서울시 종로구 종로2가 종로타워 앞. 보신각과 마주하는 도로변에 서 있는 '바르게 살자'
표지석을 보며 대학생 이장준(28)씨가 허탈한 듯한 웃음을 지었다. 지난 2007년 바르게살기운동 종로구협의회가 건립했다는 이 표지석은 육중한
덩치를 자랑하며 7년째 이곳을 지키고 있지만 표지석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오가는 시민들에게 별로 와 닿지 않는
듯했다.
법에 의해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지원받는 3대 '관변단체' 중 하나인 바르게 살기
중앙운동협의회(바살협)가 10여년째 전국의 거리 곳곳에 '바르게 살자'라는 표어가 새겨진 표지석을 설치하고 있다. 이를 두고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는 비판과 함께 도로만 점유하면서 비용만 낭비할 뿐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바살협과 지역지부들이 '바르게 살자' 표지석을 본격적으로 세우기 시작한 것은 1999년. '바른
생각, 바른 행동으로 건강한 사회를 만들자'는 취지를 내세웠다. 올해 들어서도 경기 포천시,경북 영천시, 제주 대정읍 등에 새로 건립되는 등
설치 작업은 계속되고 있다. 바살협은 향후 이 표지석을 1000개까지 늘리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같은 표지석의 내용ㆍ디자인 모두가 시대착오적일 뿐더러, 당초 목표인 공익적
목적에도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최인규 인제대 시각디자인과 교수는 "육중한 크기로 시민들의 시선에 부담을 주는 데다 도심
공터ㆍ녹지를 점유한다는 점에서 시민의 향유공간을 빼앗는 것이라 볼 수 있다"면서 "또 기단석에 어울리지 않는 원석을 올린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는
60~70년대에나 유행하던 디자인이다"고 지적했다.
이성용
공공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도 "표지석도 일종의 매체라고 볼 수 있는 만큼, 특정단체를 연상시킬 수 있는 표지석이 계속 노출되면 단체 알리기에는
효과적일 수 있다"면서도 "다만 '공정(Fairness)', '창조경제' 등 국민들이 필요로 하는 새로운 메시지들도 많은데 철 지난 5공 시절
구호를 반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메시지 자체의 효과는 크지 않다고 본다"고 꼬집었다.
시민단체들은 더욱 강도 높게 비판하는 목소리다. 전상봉 서울시민연대 대표는 "바르게 살려면 시민들이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제도적 시스템을 갖추고 만드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며 "계도라는 20세기의 낡은 유물들이 다시 역행해 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조성연 당진참여자치연대 사무국장은 "조직폭력배들이 자기 몸에 '착하게 살자'는 글자를 새기듯 전국 지자체의 몸에 '바르게
살자'는 문신을 새기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시민들의 의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회사원 김희원(32ㆍ여)씨는 "종로에서 직장을 다닌 지 벌써 4~5년 됐지만 저런 것(바르게 살자 표지석)이 있는지도
몰랐다"며 "잘은 모르겠지만 바르게 살자고 하면 바르게 살게 되나, 하는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표지석 건립에 투입되는 비용도 적지 않다. 석자재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2m×1m×40cm 규모의
표지석을 건립할 때 소요되는 비용은 원석, 기단석, 시공, 가공(글자 새김) 비용을 포함해 500~600만원 선에 달한다. 과거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이같은 표지석 건립 비용에 직접 예산을 투입해 시민사회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지난해 8월 지방재정법 개정 이후 이 같은
예산 지원이 선심성으로 분류돼 제동이 걸렸다. 현재는 바살협 지역 지부 임원ㆍ회원들의 성금을 모아 표지석 건립 비용을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바르게살기중앙운동협의회는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만들었던 '사회정화위원회'의 후신으로, 민주화 이후 지금의 이름으로 명칭을 바꿨다. 1991년 제정된 '바르게살기운동조직 육성법'에 의해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로부터 보조금을 지원받고 있다. 중앙정부로부터 올해에 받은 보조금은 12억원이며 기초 지방자치단체로부터는 지난해에 약
76억원(부산광역시 제외, 최재천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의 보조금을 지원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