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 한국전쟁 중 최초의 집단 민간인 학살사건인 '국민보도연맹' 사건. 60여 년이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피해자 보상은 물론 진실규명조차 역사 속에 묻힐 처지에 놓였다. 정부가 진실규명에 소극적인 가운데 당시를 기억하는 희생자 유족들이 가슴에 한을 묻은 채 하나 둘 생을 마감하고 있다. 진실을 밝혀 명예를 회복하고 싶다는 그들의 목소리는 그래서 더욱 절절하다. 연합뉴스는 3회에 걸쳐 보도연맹 사건의 현주소를 진단해본다.>
(청주=연합뉴스) 전창해 기자 = 이승만 정부는 1949∼1950년 좌익 관련자들을 전향시키고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국민보도연맹'이란 단체를 조직했다.
주로 사상범을 대상으로 했지만 지역별 할당이 떨어지고 공무원들의 실적 올리기 경쟁이 불붙으면서 순수 민간인이 등록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보도연맹원들이 남하해오는 북한군과 결탁할 것을 우려, 위험 요소를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이들을 즉시 구속하고 형무소 경비를 강화토록 했다.
이 조치로 북한군이 충북에 입성하기 일주일 전인 1950년 7월 5일께 청원군 오창면과 진천군 진천면 보도연맹원 400여명이 오창면 장대리 양곡창고에 갇혔다.
그로부터 6일 뒤인 11일 새벽 이곳을 지나던 헌병대와 군인들이 창고에 갇힌 연맹원 대다수를 살해했고, 이날 오전 8시30분께 국군 수도사단의 요청에 따라 미군 전투기가 창고 주변을 폭격해 생존자도 대부분 사망했다.
이것이 바로 '국민보도연맹' 사건 중 대표적으로 알려진 충북 청원 오창 양곡창고 학살 사건이다.
이 기간에 충북 12개 시·군에서는 최소 6천명에 가까운 민간인이 보도연맹원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전국적으로는 약 2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보도연맹과 같은 민간인 학살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해 정부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을 토대로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과거사정리위)를 발족했다.
이어 같은 해 12월부터 1년간 희생자 유족들로부터 진실규명 신청을 받았다.
-
- 청주서 한국전쟁 민간인희생자 합동추모제
- (청주=연합뉴스) 황정현 기자 = 3일 오후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충북NGO센터 대회의실에 청주·청원 보도연맹유족회 회원 70여명 한국전쟁 당시 억울한 죽임을 당한 민간인 희생자 1천 500명의 넋을 기리는 합동 추모제를 열었다. 2013.7.3. sweet@yna.co.kr
하지만 이를 통해 억울한 희생이 증명된 민간인은 4천934명에 불과하다.
수많은 유족이 진실규명을 신청하기까지 1년이라는 접수 기간은 너무도 짧았다. 대부분 접수 사실을 몰라 신청을 하지 못했다.
이런 사실을 알고도 '빨갱이'로 몰려 평생을 죄인 아닌 죄인으로 살아야 했던 일부는 또 다른 피해를 우려해 신청을 포기했다.
결국 과거사정리위는 전체 보도연맹 희생자 가운데 2.5%인 4천934명의 명예만 회복시킨 뒤 2010년 12월 모든 활동을 종료했다.
진실을 규명하지 못한 유족은 국가배상의 길도 막혔다.
법원에서는 과거사정리법이 국가의 불법행위를 일괄 정리하려는 시도였던 만큼 진실규명 조사 절차가 진행될 당시 신청하지 않은 것을 권리 행사 포기로 간주하고 있다.
정부가 과거사정리위의 활동을 재개하거나 관련법을 새롭게 제정하지 않는 한 뒤늦게 진실을 밝히고 싶은 수많은 희생자의 한을 풀어줄 방법이 없다는 얘기다.
조동문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전국유족회 사무국장은 "정부의 진실규명 신청이 재개되면 그 즉시 접수할 수 있도록 유족회 차원에서 미신고자 접수를 하고 있지만 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알 수가 없다"고 답답해했다.
그는 이어 "보도연맹 진실규명을 역사의 올바른 정립이 아닌 단순 민원으로 보는 정부의 무관심이 가장 큰 문제"라며 "전쟁 중 정부가 범한 참혹한 범죄인 만큼 보다 책임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2013/07/09 06:00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