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편으로 연재 재개
(서울=연합뉴스) 황윤정 기자 = "왜 책 이름을 論語(논어)라고 했을꼬?"라는 서당 훈장의 질문에 박첨지네 마당쇠가 기다렸다는 듯 손을 번쩍 든다.
마당쇠의 답이 가관이다.
"지가 말해보겠십니도. 논에서 쌀이 나걸랑요. 그것처럼 논어책으로 공부해서 풍년 들듯 큰 결실을 이루라고죠. 또 논엔 고기가 살잖아요. 그래서 논(논바닥 논)어(고기 어)"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논어'를 '논바닥 고기'라고 하자 아이들이 배꼽을 잡고 웃는다.
윤승운(70) 화백의 역사명랑만화 '맹꽁이 서당'이 다시 문을 열었다.
조선시대 서당을 배경으로 훈장과 학동들의 이야기에 조선의 역사를 풀어낸 '맹꽁이 서당'은 만화잡지 '보물섬'에 1982년 창간호를 시작으로 9년간 연재되며 큰 인기를 끌었다. 2006년에는 15권의 단행본(웅진주니어 펴냄)으로 나왔다.
윤 화백은 올 4월부터 웅진씽크빅의 어린이잡지 '생각쟁이'에 '맹꽁이 서당' 논어편의 연재를 시작했다. 단행본을 완간한 뒤 7년 만에 다시 '맹꽁이 서당'을 여는 셈이다.
최근 기자와 만난 윤 화백은 "'논어'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이들에게 '논어'를 읽히려고 '논어'를 주제로 '맹꽁이 서당' 연재를 다시 시작했는데 아이들이 책을 덮게 생겼어요. 재미없어도 아이들이 한번 봐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하고 있어요."
윤 화백은 "재미가 없어서 걱정이다"며 겸손하게 말했지만 다시 돌아온 '맹꽁이 서당'은 여전히 유쾌하고 재미있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장난꾸러기 학동들을 어떻게든 공부시키려는 훈장과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공부를 안 하려는 학동들의 모습은 절로 웃음을 자아낸다.
서당 학생 수도 늘었다. '맹꽁이 서당'의 '감초'였던 박첨지네 하인 마당쇠와 박첨지도 어린 학동들과 함께 공부한다.
어려운 '논어'에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는 윤 화백의 솜씨는 여전히 발군이다.
사실 '맹꽁이 서당' 논어편은 윤 화백의 숙원이었다. 쓱싹쓱싹 쉽게 그린 것 같지만, 만화 한 컷 한 컷에는 윤 화백의 노력이 배어 있다.
'논어'를 소재로 한 만화를 그리고 싶었던 윤 화백은 쉰 넘은 나이에 작정하고 '논어' 공부를 했다. 1990년대 성균관대 사회교육원에서 한문연구과정(2년제)을 수료한 데 이어 성균관 한림원에서 5년 과정을 마쳤다. 7년 동안 공부하면서 '논어'를 네다섯 번 뗐다. 집 책꽂이에 꽂힌 논어 관련 책만 100여 권에 이른다.
"막상 '논어'를 시작은 했지만 실력이 다 드러나는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제 나이가 일흔인데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欲 不踰矩·나이 일흔에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라는 공자의 말처럼 일흔이 되니 뜻했던 바('논어' 만화 집필)가 이뤄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구요."
윤 화백은 "'논어'를 읽어보면 별다른 얘기가 없고 싱겁다"면서 "하지만 그 의미가 깊다"고 했다.
"우리는 점점 공자를 잊어버리고 있지만 공자의 학문은 2천500년 동안 시들지 않고 싱싱하게 살아있어요. 서양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열심히 공자 등 동양사상을 연구하고 있어요. 공자가 살았던 시대는 신분 사회였지만 그가 강조한 어질 인(仁)에는 민주주의 싹이 숨겨져 있어요."
1943년 함경북도 종성에서 태어난 윤 화백은 한국전쟁 이후 피폐하던 시절 어린이들에게 꿈과 웃음을 준 한국 명랑만화의 개척자 중 한 명이다.
윤 화백은 열여덟 살이던 1961년 '아리랑' 신인만화 공모전에 입선하면서 만화 인생을 시작했다. 길창덕, 신문수, 박수동, 이정문 등과 함께 1960-70년대 명랑만화 전성기를 이끌었다.
'꼴찌와 한심이' '두심이 표류기' '요철 발명왕' '탐험대장 떡철이' 등 내놓는 작품마다 인기를 끌었지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은 역시 '맹꽁이 서당'이다.
"할아버지가 역사책을 좋아하셨어요. 제 나이 스무 살 무렵 할아버지가 두꺼운 역사책을 사오셨는데 조선왕조 이야기였어요. 너무 재밌었어요. 만화로 그려봐야겠다고 맘먹었는데 이뤄진 거죠. 양평의 한 미술관에서 강의를 했는데 어린 아이들도 '맹꽁이 서당'을 읽었다고 해서 놀랐어요."
장난기 가득한 눈빛과 표정. 올해 칠순이 된 윤 화백은 '맹꽁이 서당' 학동들과 영락없이 닮았다.
"만화만 그리면 마냥 즐거웠어요. 만화를 그리려고 책상에 딱 앉으면 '올인'이 돼요. 돈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았어요. 만화 캐릭터는 만화가의 분신이에요. '맹꽁이 서당'을 그릴 때 훈장과 학동들이 웃으면 저도 같이 웃고 얼굴을 찡그리면 저도 찡그리죠. 얼마나 좋아요. 이보다 즐거운 세상이 또 있을까요."
50년 넘게 만화를 그려온 윤 화백은 영감을 받은 선배 만화가로 '꺼벙이'와 '순악질 여사'로 유명한 '명랑만화의 대부' 고(故) 길창덕 화백을 꼽았다.
"열아홉 살 때 선생님께 만화를 어떻게 그리느냐며 편지로 물어봤어요. 근데 선생님이 답장을 보내주신 거예요. 선생님은 제게 '공자 선생님' 같은 분이에요. 바쁜 중에도 찾아가면 반갑게 맞아주시고 선생님한테 많은 영향을 받았죠."
지금도 '아날로그식'으로 직접 펜으로 만화를 그리는 윤 화백은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하는데 제가 바로 그렇다"면서 "재주가 없지만 죽자사자하다 보니 지금까지 오게 됐다"고 겸손해했다.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2013/06/18 15:27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