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간의 '등급'을 풍자적으로 표현
춤·조명·음악·무대연출 조화 이뤄
(서울=연합뉴스) 강일중 객원기자 = 잘 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을 가르는 기준은 돈과 권력일까? 귀족사회가 붕괴한 지 오래된 지금 사회에도 사람 사이에 등급이 있을까?
16일까지 이틀간 대학로의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무대에 오른 현대무용 '등급(The Grade)'은 이런 질문을 던지고 현실사회의 모습을 풍자한 작품이다.
언뜻 생각하면 주제 자체는 다소 진부한 듯하다. 그렇지만 작품의 구성과 몸짓, 조명, 음악, 무대연출 등 세부 요소들에는 참신함이 있다.
또 그들 사이의 조화가 작품의 대중성과 예술성을 함께 살려내면서 주제의식을 새삼스럽게 일깨운다.
이 작품은 첫 장면부터 강한 흡인력을 발휘했다. 배경음악으로는 드뷔시의 '프렐류드' 중 '불꽃'이 흐르고, 무대 바닥에서 약 1.6m 높이로 옅은 붉은빛을 띠는 조명에 의해 무대 좌우를 가로지르는 구름띠 같은 것이 생겨난다.
무용수들은 띠 아래의 어두운 곳에서 장소를 이동해 가며 상대적으로 밝기가 약간 있는 띠 윗부분으로 머리를 쑥 내밀었다가 다시 아래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움직임을 반복한다. 노르웨이이 화가 오드 너드럼의 작품 '새벽'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고 하는 이 장면이 주는 시각적 이미지가 강렬하다.
인간이 더 높은 곳으로 상승하려는 욕구를 가졌으나 막상 올라선 위치에서 보이는 것은 삭막함밖에 없다는 것을 묘사한 첫 장면은 일종의 전주곡 역할을 한다.
이어서 윗 등급으로의 상승을 넘보며 상위 등급 앞에서 조아리는 인간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튕겨나가거나 부와 권력에 찢기는 패배자의 모습 등이 풍자적으로 무용수들의 몸짓에 의해 그려진다.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오브제로 와인잔을 사용한 것이 흥미롭다. 경쟁에서 승리하고 윗 등급으로 올라선 사람만이 와인을 마실 뿐 그를 제외한 모든 출연진은 와인잔을 건네주고 따라줄 뿐이다. 무대 연출에서 극장의 무대 아래 오케스트라 피트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극 중 경쟁에서 탈락한 인간은 이곳으로 떨어지고, 피트 아래에서 아래 등급의 사람들은 빈 와인잔을 정리하면서 윗 등급의 승리자를 동경의 눈으로 쳐다본다.
와인잔은 부와 권력을 상징한다. (사진=강일중) |
여러 요소 중에서 가장 빼어난 것은 무용수들의 춤이었다. 12명 무용수가 여러 장면에서 기억에 남을 만한 군무를 만들어냈으며 흠뻑 빠질 수 있는 솔로나 듀엣을 보는 재미가 톡톡히 있었다. 자주 군무진과 떨어진 위치에서 독무 비슷한 춤을 춘 박은영이 만들어낸 미세한 몸의 움직임은 매혹적이었다. 그와 안보영의 듀엣, 또 치열한 경쟁상황을 묘사한 전혁진과 김경일의 듀엣 역시 흡인력이 강했다.
이 작품의 안무가이며 출연도 한 전혁진은 1983년생으로 백마고등학교 재학 때 세 단 뛰기 육상선수로 활동하다 무용을 시작한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동아무용콩쿠르 금상, 요코하마댄스콜렉션 심사위원상, 스페인의 마스단자컨템포러리댄스페스티벌 베스트안무가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동행', '신세계' 등 그의 안무작이 요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등급'은 그의 신작으로 이번이 초연.
'등급'은 댄스포럼이 주최한 '크리틱스 초이스'(평론가가 뽑은 젊은 무용가 초청공연)의 프로그램 중 하나로 같은 날 오설영 안무의 '유토피아 vs 유토피아', 원혜인 안무의 '어설픈 자리' 공연도 함께 있었다.
오설영 안무의 '유토피아 vs 유토피아'의 한 장면. (사진=강일중) |
오설영 안무의 작품은 무용 마니아 관객들을 무대 뒤편 의자에 배치한 후 작품 중간에 그들의 참여 아래 춤을 완성하는 독특함을 보여주었다. 원혜인 안무의 작품은 소수계층의 아픔과 서로 기대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시종일관 다섯 명의 무용수가 군무로 이어가는 것이 돋보였다.
원혜인 안무의 '어설픈 자리'의 한 장면. (사진=강일중) |
올해가 16회째인 '크리틱스 초이스 2013'은 18일과 19일 양일간 마지막 팀으로 같은 극장에서 김재덕 안무의 '무제', 염지훈 안무의 '불편한 진실', 안영준 안무의 '직관'을 무대에 올린다.
이에 앞서 지난 12일과 13일에는 이인수 안무의 '비코즈 오브 화이(Because of why)', 이영일 안무의 '사파리', 윤영숙 안무의 '어름이(爾)' 세 편의 작품이 공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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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2013/06/17 05:43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