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만에 7집 '플레이밍 넛츠' 발표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밴드 크라잉넛의 새 음악들은 마치 퍼즐 조각 같다. 조각의 생김새는 울퉁불퉁 다르지만 한데 모아 짜맞추니 명확한 '땅콩' 그림으로 완성된다.
최근 발표한 7집 '플레이밍 넛츠'(Flaming Nuts: 불타는 땅콩)가 꼭 그렇다.
다섯 멤버(박윤식, 이상면, 한경록, 이상혁, 김인수)가 각기 만든 곡들은 힙합, 메탈, 포크,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툭툭 튀어나와 개성이 돋보이지만 한 장의 앨범에 모으니 '크라잉넛 표' 펑크록이다. 이게 바로 결성 18년 된 팀의 내공이다.
지난 13일 광화문에서 만난 멤버들은 "하나의 의도를 정하지 않고 각자 자유롭게 곡을 썼다"며 "10곡을 바닥에 펼쳐보면 안 어울리는데 모아보니 각자의 상상력이 튀지 않는 교집합이 있었다. 오랜 시간 한배를 탄 덕에 우리 안에서 답을 찾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7집의 재킷에는 만화가 강도하가 선물한, 해적 모습을 한 땅콩과 해적선이 그려져 있다. 이 땅콩의 호전적인 표정은 로버트 로드리게스 감독의 B급 영화 '마셰티'(Machete)의 주연 배우 대니 트레조의 모습에서 따왔다.
"무대는 우리에게 해적선이고 음반을 내고 공연하는 건 우리에게 항해라는 의미죠. 하하."
항해의 시작을 알리는 첫 트랙도 이상혁(드럼)이 작곡한 '해적의 항로'다. 에너지 충만한 속도감 있는 사운드는 마치 뮤지컬 넘버처럼 웅장하다.
'자 항해를 시작하자, 모두 열심히 일하라, 바다는 결코 쉽지 않아, 하지만 우리도 지지 않아~.'
이상혁은 "에버랜드, 롯데월드 같은 놀이동산에 가면 있는 '신밧드의 모험' 같은 곡"이라고 '낄낄' 웃었다.
이렇게 시작되는 '땅콩 타임'은 강약을 조절한 트랙 구성으로 지루하지 않다. 멤버들이 음악을 편식하지 않은 덕에 머릿속에 담아둔 아이디어가 툭툭 튀어나와 한 곡 안에서도 다양한 장르가 혼재됐다.
'예 보이(Yeah Boy)~'로 시작하는 타이틀곡 '기브 미 더 머니'(Give me the money)는 힙합 비트에 마치 내레이션처럼 들리는 이상혁의 랩, 코드 세 개로만 이상혁이 연주한 우쿨렐레 소리가 가미돼 꽤 실험적이다.
한경록(베이스)은 '슈퍼마리오' 게임에서나 듣던 '뿅뿅' 전자음('레고')을 넣는 장난기를 발동했고, 이상면(기타)은 사이키델릭한 사운드('미지의 세계')와 산울림의 멜로디를 연상시키는 포크 풍('새신발')을 오갔다. 김인수(키보드)가 절규에 가깝게 노래한 메탈('땅콩')은 신선한 반전이다.
전반적으로 떠들썩하고 흥겨운 사운드와 보조를 맞춘 건 위트 넘치는 노랫말이다. 목청 꽤나 지른다는 남자들의 노래방 18번인 이들의 히트곡 '말 달리자'나 하지원이 출연한 은행 광고에 삽입된 '룩셈부르크'만큼 재기 발랄하다. 그러나 멤버 모두 불혹 언저리로 나이가 들어서인지, 욕심을 부리지 않아서인지 불편한 세상에 대한 날 선 비판을 했던 6집보다 한층 둥글둥글해졌다.
'삶은 삶은 세탁이다~'('5분 세탁), '난 난 돈이 필요해 (중략) 나는 등골브레이커~'('기브 미 더 머니'), '우리들은 땅콩들 몸에 좋은 견과류 (중략) 잣 같은 땅콩이라네'('땅콩')….
각 멤버들의 동상이몽(同床異夢)이 담긴 노랫말에는 흥미롭게도 관통하는 정서가 있다. 때론 직설적이고 때론 저렴한 듯 들리지만 방황하는 청년들, 외톨이, 일상 탈출을 꿈꾸는 자신들, 무너지고 비틀대는 이들을 위로하는 살뜰한 마음이 담겼다. 그러나 멤버들은 요즘 남발되는 '힐링'을 강조하거나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식의 비현실적인 격려는 거부한다고 강조했다. 또 한경록만 제외하고 모두 유부남들이어선지 절절한 사랑 담론을 찾아보기 힘든 점도 특이점이다.
이 결과물의 모든 공정 과정은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일일이 멤버들의 손을 거쳤다. 이상면은 앨범 크레디트에 레코드 엔지니어와 믹싱 엔지니어로도 이름을 올렸다. 인디의 정체성을 지킨 행보이자 진정한 의미의 DIY(Do It Yourself) 작품인 셈이다.
이상면은 "다들 부담을 버리고 곡을 썼지만 난 레코딩과 믹싱 작업까지 하느라 '멘붕'이었다"며 "이 작업이야말로 엄청 부담됐다"고 강조했다.
이상혁은 "굳이 인디펜던트는 이런 것이라고 내세우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크라잉넛이란 브랜드를 지켜가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덧붙였다.
자신들의 창작물에 대한 자부심과 의지는 앞서 행보에서도 엿보였다. 이들은 지난 2월 아이돌 밴드 씨엔블루가 자신들의 음악 저작권을 침해했다며 법적으로 문제제기를 했다. 씨엔블루가 크라잉넛의 2002년 곡 '필살 오프사이드(Offside)'의 원곡 음원을 방송에서 무단으로 사용하고 방송 출연 영상을 DVD에도 수록했기 때문이다.
한경록은 "음악 권리자들의 지적재산권이 보호받는 환경을 위해, 힘없는 인디 밴드들을 위해 판례를 만들고 싶었다"고 짧게 답했다.
최근 밴드들이 1대 1 경연을 펼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인 엠넷 '머스트(MUST) 밴드의 시대'에 출연한 것도 경연이란 방식이 꺼려졌지만 1세대 인디 밴드로서의 책임감으로 출연을 결정했다.
그러나 진지한 답변도 잠시. 이들은 시종일관 유머를 잃지 않았다.
7집이 약 4년 만의 정규 앨범인데 다음 앨범은.
"새 술이 익기 전에 나 돌아올게요."('여름'의 노랫말)
크라잉넛 음악은.
"타임지(紙)가 선정한 10대 슈퍼푸드, 잣만큼 영양만점이죠." ('땅콩'의 노랫말)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2013/06/14 05:05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