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오네긴' 무대 끝으로 은퇴…"다 쏟아부었기에 후회 없어"
(서울=연합뉴스) 임수정 기자 = "다시 태어나도 발레를 다시 하진 않을 거에요. 그만큼 다 누렸고, 또 그만큼 처절했어요. 다시 하라고 그래도 제가 노력했던 것 그 이상을 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여한이 없습니다."
무엇인가를 위해 마음을 다해 헌신했던 자의 마지막은 이토록 단단하고 아름답다.
26년간 발레와 함께 살아왔으며 그 중 19년을 프로 무용수로 무대에 서온 유니버설발레단(UBC) 수석무용수 강예나(38)가 다음 달 '오네긴' 무대를 마지막으로 은퇴한다.
강예나는 '최연소', '최초'의 기록을 유난히 많이 가진 스타 발레리나. 영국 로열발레학교에 입학한 것도, 러시아 키로프 발레단과 미국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 입단한 것도 한국인으로서 그가 최초였다. UBC 최연소 수석무용수라는 타이틀도 갖고 있다.
그의 이상적인 신체 조건과 서구적인 마스크도 많은 이의 부러움을 샀다.
하지만 그는 무대 위 화려함만을 아는 발레리나가 아니다. 1998년 ABT 입단 직후 급작스럽게 찾아온 왼쪽 무릎 십자인대 파열로 끊임없이 부상의 고통과 싸워야 했다.
그를 다시 일으킨 것은 결국 노력과 성실, 연습이었다. 어느 발레단에서도 가장 먼저 연습실에 들어서고, 가장 마지막으로 연습실을 나가는 무용수가 강예나였다.
2004년 국내로 돌아와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로 재기에 성공했으며 이후 방송 MC와 발레 해설자 등으로도 활약해왔다.
최근 서울 능동 UBC 연습실에서 그와 만나 은퇴 소감과 향후 계획 등을 물었다. 그는 다양한 진행과 인터뷰 경험을 통해 다져진 매끄러운 말솜씨로 질문에 하나씩 답해나갔다. 하지만 발레리나로서 수많은 경험을 거친 그에게도 은퇴는 당연히 '처음 겪는 일'. 그는 인터뷰 중간 중간 눈시울을 붉히기도,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곧 마지막 무대를 앞두고 있다. 소감이 어떤가.
▲작년부터 이쯤을 은퇴 시점으로 생각해왔다. 은퇴 시기를 아는 것은 무용수로서 시한부 인생을 사는 것과 같다. '호두까기' 공연부터 '백조의 호수', '심청'까지 내가 지금까지 서 왔던 무대와 하나씩 작별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이제 정말 한 작품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감정의 폭이 자꾸 커지고 눈물도 많아진다. 하지만 마지막 무대에서는 울고 싶지 않다. 미리 많이 울고, 겪을 감정도 다 겪어내 마지막 공연을 담백하게 끝내고 싶다.
--마지막 무대가 '오네긴'이다.
▲원래 UBC 7월 공연은 '라 바야데르'였는데 국립발레단과 레퍼토리가 겹치면서 '오네긴'으로 바뀌게 됐다. 하지만 난 하늘이 도우셨다고 생각할 정도로 '오네긴'에 큰 애착이 있다. 풋사랑을 할 시절의 청순하고 순진한 10대 모습부터 중후한 아름다움으로 꽃핀 중년의 모습까지를 보여줘야 한다. 대서사시 같은 성격의 작품이다. 이 때문에 내 지난 모든 시간과 드라마를 여한 없이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이번에 '오네긴' 무대에 ABT 첫 한국인 수석 무용수 서희도 함께 선다. 작년 서희 승급 소식에 "내가 못다 이룬 꿈 네가 이뤘다"며 축하 메시지를 트위터에 남기기도 했더라. 'ABT 입단 직후 그 부상만 없었더라면'이라는 아쉬움은 없나.
▲분명 큰 시련이었지만 내 운명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안 다쳤더라면 내 인생이 어땠을까' 등의 생각은 하지 않는다. 또 우연이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나 같은 경우에는 부상을 통해 얻은 게 더 많았다. 재활에 매달리며 발레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내 모습을 재발견했고, 그 힘으로 지금까지 무대에 서온 것일지도 모른다. 또 밑바닥부터 다시 쌓아올리며 내공을 다질 수 있었던 귀한 시간이기도 했다.
--무용복 브랜드 '예나라인'을 만들어 디자이너 겸 사업가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데.
▲원래 패션 쪽에 관심이 많았고 무용복 디자인에도 관심이 많았다. 무용 연습복은 무용수들에게 제2의 피부와도 같다. 예쁘고 잘 맞는 무용복을 입으면 연습까지 더 잘 되지만, 반대로 잘 안 맞고 단점마저 부각시키는 의상을 입고 있으면 빨리 연습을 끝내고 싶어진다.(웃음) 후배들한테 그런 소소한 행복감을 주고 싶었다.
--발레는 지난 26년간 당신에게 어떤 의미였는가.
▲아주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가서 처음으로 섬겼던 남편 같다.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최선을 다해 섬기기로 서약했었고, 26년 동안 정말 그렇게 했다. 이제는 서로 보내줄 때가 온 것 같다. '너 할 만큼 했다, 정말 열심히 했다, 이제 헤어져도 괜찮다'고 발레가 내게 말해주는 것 같다.
7월 6일부터 13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강예나는 6일 오후 3시·10일 오후 7시 30분·13일 오후 7시 공연) 1만-10만원. ☎070-7124-1737.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2013/06/02 12:36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