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 앞세운 프로그램 잇따라 고전, 일부 폐지
'돌직구' 원하는 시청자에 꾸밈없는 다큐식 예능 부상
(서울=연합뉴스) 이태수 기자 = 지난해 방송가에 몰아친 '힐링' 열풍이 예전만 못하다.
대표 주자인 SBS TV 토크쇼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는 최근 한 자리대 시청률에 허덕이고 있고, 마찬가지로 따뜻한 공감을 내세운 '땡큐'도 5% 전후에 머문다.
반면 '힐링'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일부 프로그램은 여전한 화제를 몰고 다닌다.
MBC TV '황금어장 - 라디오 스타'는 '돌직구' 토크를 앞세워 같은 시간대 1위를 기록하고 있고, 날 선 토크의 대명사인 방송인 김구라는 최근 1년 만에 KBS 2TV '이야기쇼 두드림'과 SBS TV '화신, 마음을 지배하는 자'로 지상파 복귀를 알렸다.
◇ 힘 못 쓰는 '힐링' 프로그램 = 올해 들어 방송가 '힐링' 프로그램의 하락세는 뚜렷이 드러난다.
SBS TV '힐링캠프'는 최고 시청률인 18.7%(닐슨 코리아. 전국 기준)를 기록했던 지난해 안철수 편을 비롯해 꾸준히 두 자리대 시청률을 유지했지만, 올해 들어 대부분 10% 아래에 머문다.
지난 20일 전파를 탄 장윤정 편은 전주보다 2배 이상 '껑충' 뛴 12.1%를 기록했지만, 이는 최근 불거진 장윤정의 빚과 가정사 논란 덕분이지 '힐링'과는 거리가 멀었다.
강호동의 KBS 복귀작으로 올 초 관심을 한몸에 받고 출발한 '달빛프린스'는 3.3%의 처참한 시청률을 마지막으로 8회 만에 쓸쓸히 폐지됐다. 매주 한 권의 책을 선정해 이와 관련한 게스트의 인생사를 진솔하게 풀어낸 이 프로그램은 따뜻한 토크를 지향했지만,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데는 실패했다.
또 명사들의 성공담을 들려주는 케이블 채널 tvN의 '김미경쇼'는 지난 3월 메인 MC 김미경의 논문 표절 의혹에 폐지됐고, 대국민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공감'을 내세운 SBS TV '화신'은 시청률 부진을 겪다 최근 포맷을 대폭 바꿨다. 게스트에 관한 루머를 직격으로 물어보는 '풍문으로 들었소' 등의 코너를 더하고, '돌직구'의 대명사인 방송인 김구라를 새 MC로 투입시켰다.
원만식 MBC 예능본부장은 "기존의 흐름에 싫증을 내면, 그것에 대한 반발로 다른 트렌드가 올라온다"며 "요즘은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은 선에서 '돌직구'로 말하는 분위기"라고 짚었다.
◇ '힐링', '해명의 장'으로 전락..멘토들의 논란도 일조 = 이 같은 경향은 '힐링' 프로그램들이 원래의 취지와는 달리, 논란이 불거진 유명인의 '해명'에 급급했던 것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시청자들의 신뢰를 잃어버렸다는 것.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힐링'의 의미가 상당히 퇴색됐다. 누구를 위한 '힐링'인지 알 수 없는 것"이라며 "시청자는 더는 연예인의 이야기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일반인에 대해서 관심을 지니게 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일반인 출연자가 자신의 사연을 풀어내는 KBS 1TV '강연 100℃'나 2TV '안녕하세요' 등은 모두 10%에 육박하는 시청률로 선전하고 있다.
'힐링'의 또 다른 얼굴인 '자기 계발'도 더는 대중에게 먹히지 않는다는 분석도 있다.
'열정' '희망' 같은 듣기 좋은 말로 포장했지만, 냉혹한 사회 현실서는 '희망 고문'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스타' 반열에 오른 일부 멘토들의 잇따른 최근 논란이 '힐링'의 퇴조를 부채질한 측면도 있다.
'스타 강사' 김미경은 지난 3월 이화여대 석사 논문이 기존 논문 4편을 표절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진행하던 tvN '김미경쇼'에서 하차했다. 이 프로그램은 곧 폐지됐다.
또 젊은이들의 '멘토'로 트위터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소설가 이외수는 혼외자가 존재하고, 관련 양육비 소송에 휘말렸다는 사실이 지난 3월 알려지면서 세간에 충격을 안겨줬다.
◇ 시원한 '한 방' 원하는 대중들..다큐식 예능 부상 = 대중들은 이제 포장된 '힐링'보다는 시원한 '한 방'을 찾게 됐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김구라의 부상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문강형준 문화평론가는 "'돌직구'는 삶의 속도가 빠르고, 결과가 중시되는 한국 사회에서 특징적인 문화"라며 "이는 거칠고 교양 없어 보이지만, 가려진 진실에 대한 열망을 표현한다. 우리 사회는 모든 면에서 불투명한 측면이 많아서 '돌직구'는 카타르시스를 낳는다"고 짚었다.
김구라는 최근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요즘은 사회 분위기 자체가 돌려 말하지 않고, 약간 '스트레이트'(straight)하지 않느냐"며 "돌려 말하더라도 대중들은 어느 정도 스스로 파악한다"고 방송가 분위기를 전했다.
또 "사회 자체가 복잡해진데다가, 한 이슈가 검색어에서 몇 시간 1위를 차지하기 쉽지 않을 정도로 여러 상황이 일어난다"며 "이런 게 방송에도 투영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힐링' 프로그램의 퇴조는 곧 포장되지 않은 다큐식 예능 프로그램의 흥행으로 이어졌다. 또 연예인의 구구절절한 해명 대신 일반인의 이야기가 주목을 받았다.
최근 시청률 강자 자리에 오른 MBC TV '일밤'의 두 코너 '아빠 어디가' '진짜 사나이', '나 혼자 산다', KBS 2TV '안녕하세요' '인간의 조건'은 이러한 새 트렌드의 선두 주자다.
'화신'을 연출하는 SBS 심성민 PD는 "요즘은 단순히 재미있다고 시청자가 보지는 않는다"며 "무언가 공감할 수 있거나, 직접적으로 피부에 와 닿는 프로그램을 좋아한다. '정글의 법칙'도 연예인이 오지에서 고생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진심이 드러나 인기를 얻지 않았느냐"고 설명했다.
그러나 '힐링' 열풍이 다른 형태로 생명을 이어갈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문강형준 문화평론가는 "문화적 유행은 기본적으로 '위로'의 역할을 한다"며 "'힐링'이 따뜻하게 감싸고 토닥이는 방식이라면 '돌직구'는 막힌 속을 뚫어주는 방식으로 대중을 위로한다. 두 방식 모두 자본주의 사회의 대중문화가 지닌 기능"이라고 설명했다.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2013/05/26 11:00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