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입가능 직원 3명중 1명…음지서 일하며 소중한 문화유산 관리
(서울=연합뉴스) 장하나 기자 = 삐리릭 삑. 삼중 보안 시스템을 거치자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의 빗장이 조심스레 풀렸다. '통제구역'이라고 적힌 철문에 달린 손잡이를 돌려 내부로 들어섰지만, 또다시 육중한 철문이 앞을 가로막았다.
다시 삼중 보안 시스템을 거쳐 철문을 통과했다. 그야말로 철통보안이다.
그제야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의 '부채를 든 자화상'(등록문화재 제487호)을 비롯한 수많은 미술 작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직원들도 한 번도 못 들어가 보고 퇴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내 수장고의 모습이다.
화이트큐브에서 조명을 받아야 더욱 빛을 발하는 걸작들이지만 사실 작품에 있어 전시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바로 관리와 보존이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내 수장고 |
전시를 기획하는 큐레이터는 '미술관의 꽃'으로 불리며 종종 주목받지만 작품을 관리하는 '레지스트라'는 작품 분실이나 도난과 같은 '대형' 사건·사고가 있지 않고서는 존재 자체가 드러날 일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로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오해받기도 한다.
이처럼 "음지에서 일하며" 수장고를 관리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의 레지스트라 권성오(51)씨를 최근 과천관 수장고에서 만났다.
권씨는 국립현대미술관 내에서 수장고에 출입할 수 있는 직원 3명 중 1명이다.
수장고 출입이 가능한 나머지 2명은 '관리관'인 미술관장과 현재 학예연구2실장이 맡은 '운영관'인데 이들도 권씨와 함께라야 수장고에 들어갈 수 있다. 수장고 출입은 2인 1조가 원칙이기 때문이다.
1988년 4월 미술관에 들어오기 전까지 미술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권씨는 처음 작품 관리 담당 부서에 발령을 받았다. 당시 선임은 그에게 각종 미술 관련 서적을 읽게 하고 작품을 본 뒤 감상문도 적어 내게 했다.
근무를 시작했을 때가 과천관으로 이전한(1986년 8월) 이후여서 권씨는 포장도 안 뜯고 쌓여 있던 작품 2천800여 점을 장장 6개월 동안 한 점 한 점 일일이 확인하며 정리했다. '작가 미상'으로 등록돼 둘둘 말아 보관 중인 작품도 다수 있었다.
"당시 미술 공부를 할 겸 시간이 날 때마다 조선미술전람회(선전) 도록 등을 살펴보곤 했어요. 그러다가 좀 퇴색은 됐지만 선전 도록에 수록된 작품과 '작가 미상'으로 구분됐던 작품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렇게 찾아낸 작품이 바로 이갑향의 '격자무늬 옷을 입은 여인'이다. 권씨의 어깨가 으쓱해진 순간이었다.
권씨는 "작가와 작품 미상으로 남겨질 작품에 본래의 이름을 찾아 줬을 때 큰 보람을 느끼게 됐다"며 "그때의 열정과 애정 때문에 지금도 작품 관리라는 업무를 좋아하고, 계속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1995년께 인사 발령으로 전시 진행, 교육 등 잠시 다른 업무를 맡았던 권씨는 2007년 1월 자원해 작품 관리 업무로 복귀해 지금까지 국립현대미술관의 수장고 '열쇠'를 책임지고 있다.
그 사이에 소장 작품 수는 3배가 넘는 9천600여 점이 됐고 미디어와 설치 등 다양한 매체의 작품도 늘었다.
이전에는 직원의 수장고 출입도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지만 2008년 화가 주경의 1930년작 드로잉 '인물습작'이 도난당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관련 규정이 재정비됐다.
"이전에는 직원이 수장고에 들어가서 작품을 본 뒤에 다른 위치에 옮겨 놓는 일도 많았어요. 한 마디로 작품 관리가 엉망이었죠. 작품이 없어지거나 훼손돼도 한참 뒤에나 알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감사 등으로 고생하긴 했지만 지금은 덕분에 작품 관리가 안정화됐어요."
권씨는 작품 출납과 대여 심의, 전산 등록 등 작품 관리와 관련된 전반적인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작품의 안전성을 확인하려면 자주 수장고 환경을 점검하는 수밖에 없다. 방수·방염 등의 기능을 갖춘 수장고의 온도는 20±2℃, 습도는 55±5%를 항상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 작품에 안정적인 환경을 제공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1년에 한 번은 40여 일을 '올인'해 9천600여 점의 작품을 전부 한 점씩 눈으로 확인해 일일이 기록한다.
미술관 소장 작품을 외부 기관에 대여할 때는 직접 현장을 방문해 해당 미술관의 온도와 습도, 조도, 보안 상태 등까지 사전 점검해야 한다.
워낙 작품 수가 많다 보니 작품의 반출 여부, 이동 경로 등 그날 있었던 일은 아무리 세세한 일이라도 무조건 그날 기록해야 한다. 자칫하면 작품의 현재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는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꼼꼼한 성격 탓도 있지만 항상 기록하는 것이 몸에 밴 덕분에 친구들과의 모임에서도 총무 역할을 도맡게 된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사실 과중한 업무에 시달릴 수 밖에 없다.
권씨는 인터뷰 내내 "전문 경력관을 도입해 레지스트라 인력을 양성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다른 업무는 한 달 정도면 대부분 인수인계가 가능하지만 작품 관리는 아무리 빨라도 업무를 익히는데 1년이 족히 걸려요. 작품 관리를 가르치는 대학도 없죠. 그러다 보니 그냥 몸으로 체득하면서 스스로 파악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입니다."
현재 그의 업무를 보조하는 직원도 전부 인턴 아니면 계약직이다. 후배 인력 양성이 사실상 불가능한 셈이다.
권씨는 "전국적으로 공·사립미술관이 계속 늘어나고 작품은 수집되고 있지만, 큐레이터나 행정 업무를 하는 이들이 잠깐씩 작품 관리 업무를 진행하는 실정"이라며 "작품 관리의 중요성을 인지해 체계적인 관리가 이뤄질 수 있는 기틀이 마련돼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열악하다면 열악한 근무 환경이지만 그는 "이곳에 보관 중인 작품이 훗날 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유산이고 후대에 전해줘야 할 의무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하기에 자긍심을 느낀다"고 했다.
"우리는 그저 잠깐 문화유산 관리를 대행해 주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잖아요. 소장품도 갈수록 늘고 있는데 지금의 수장고로는 부족합니다. 과천 야외전시장 지하에 수장고를 추가로 확장하면 좋을 텐데요. 수장고가 이른 시일 내에 확보됐으면 해요. 관련 인력도 보강하고요. 제가 퇴직하기 전에 말이죠. (웃음)"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4/04/21 07:00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