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영 아메리칸대 교수 번역…"30년 죽비 잡았던 선승"
(서울=연합뉴스) 공병설 기자 = "내 책이 영어로 번역돼 문명에 개화된 이들(서양인)이 보면 내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아들을 텐데……"
근대 한국불교의 대표적 비구니이자 문인, 사상가였던 일엽 스님(본명 김원주·1896∼1971)은 자신의 생각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1960년 '어느 수도인의 회상'을 펴낸 직후 얘기다. 자신의 본성을 잃어버렸다는 뜻의 '실성인(失性人)의 회상'이 원제였으나 어감이 안 좋다는 주위의 만류에 제목을 바꿨다.
이태 뒤 나온 수상록 '청춘을 불사르고'는 엄청난 화제를 일으키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일엽 스님이 입적한 지 40여 년 만에 염원이 이뤄졌다. 책이 나온 지 50여년 만에 영문판이 출간됐다.
미국 하와이대학 출판부가 펴낸 '어느 비구니 선승의 회상'(Reflections of a Zen Buddhist Nun)이다. 역자는 이 책을 대학원 교재로 쓰는 아메리칸대학 철학과 박진영 교수다.
일엽 스님의 '어느 수도인의 회상'과 '미래세가 다하고 남도록'에 실린 작품의 일부가 포함됐다.
일엽 스님은 목사의 딸로 태어난 뒤 신학문을 배우고 일본 유학도 다녀왔다. 최고의 인텔리 여성이었다. 나혜석, 윤심덕 등과 교류하면서 자유연애론과 신정조론으로 대표되는 여성해방운동을 이끌었다.
여러 번의 결혼과 동거 등 곡절 많은 사랑을 거친 그는 1933년 모든 것을 버리고 만공 스님 문하로 출가한다.
깨달음은 글이나 말에 기대지 않는다는 불립문자(不立文字)를 강조하던 스승의 뜻에 따라 30여 년 동안 절필하다가 대중포교를 위해 다시 글을 쓰게 된다.
처음에는 비구니의 연애담쯤으로 여겼던 이들이 책에서 감명을 받고 불교에 귀의하거나 입산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세간에는 일엽 스님의 출가를 두고 사랑의 잇단 실패 때문이라는 말이 끊이지 않았다.
일엽 스님의 4대 손상좌 경완 스님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본래 자기를 찾기 위해서였다"며 "스님은 평생 어느 곳에 있더라도 자기만의 투철한 정신으로 자신의 소리를 내는 삶을 살았다"고 했다.
일엽 스님을 모델로 삼은 것으로 알려진 노래 '수덕사의 여승'에는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눈물 흘린다는 내용이 나온다.
노래를 듣고 일엽 스님은 "노래대로라면 중으로서 타락했음을 직감하고 눈물 진 가사장삼을 벗어 거룩한 승의를 욕됨이 없게 해야 한다. 이런 노래를 감명 깊게 듣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나를 회복하는 공부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대중이 많다는 증명이니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
경완 스님은 "속세의 모습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엽 스님은 30여 년 동안 손에서 죽비를 놓지 않을 정도로 수행에 전념했다"며 "근세 불교에서 보기드문 비구니 선승이었다"고 말했다.
일엽 스님은 1971년 1월 28일 새벽 자신이 세운 첫 비구니선원 견성암에서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입적했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4/04/16 15:59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