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 화엄경 강설본…"세상 맑게 하는 작은 샘물 되기를"
(부산=연합뉴스) 공병설 기자 = "화엄 정신이 실현된 세상은 남을 아끼고 배려해서 갈등과 전쟁이 없습니다. 불필요한 소비와 개발도 안 합니다. 서양학자들조차 화엄경을 인류 최고의 걸작이라고 평가하는 이유입니다."
매달 첫째 주 월요일이면 부산 범어사 인근 문수선원에는 200여 명의 스님이 전국에서 몰려든다. 무비 스님(71·동화사 한문불전승가대학원장)의 화엄경 강의를 듣기 위해서다.
무비 스님은 쉬운 강의로 정평이 나 있다. 지난 7일에도 어려운 화엄경 이론을 쉽게 척척 풀어냈다.
"지금의 인생 자체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완전무결한 존재입니다. 이 점을 얼마나 이해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집니다. 비가 아무리 쏟아져도 그릇을 엎어놓으면 물 한 방울 담기지 않습니다. 사람도,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3시간 동안 이어진 강의가 끝난 뒤 나이 지긋한 비구니 스님이 무비 스님을 찾아왔다. "개인적인 일로 마음이 너무 힘들었는데 정말 편해졌습니다. 스님 감사합니다"라며 삼배를 올렸다.
2010년 3월 시작한 이 화엄산림대법회는 10년간 일정으로 진행된다. 조계종 역사상 단일 교육에 이렇게 많은 스님이 자발적으로 모이는 경우는 처음이다. 무비 스님의 명성을 듣고 다른 종단의 스님들까지 강의를 들으러 온다.
무비 스님은 한국불교에서 경론 강사 중에서도 대강백(大講伯)으로 꼽힌다.
흔히 화엄경(華嚴經)으로 불리는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은 불교의 출발점이다. 수많은 불교 경전 가운데 부처가 최초로 설한 경전이기 때문이다.
싯다르타 태자가 깨달음을 얻어 석가모니가 된 뒤 장소를 일곱 군데 옮겨 가면서 아홉 번의 법회에서 한 법문의 기록이다.
불교 최고의 경전이지만 부처가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별도의 풀이 없이 그대로 드러내 보였기에 내용도 어렵고 분량도 방대해 화엄경을 해설한 책은 거의 없었다.
무비 스님이 최근 펴낸 '대방광불화엄경 강설'은 한국불교 사상 최초의 화엄경 강설본(해설서)이다.
지금까지는 탄허 스님과 월운 스님 그리고 무비 스님이 낸 번역본만 나왔을 뿐이다.
화엄경 강설은 중국불교에서도 당나라 이후 3∼4 차례만 시도됐고 근대 이후에는 전 세계에서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을 만큼 엄두조차 내기 힘든 작업이다.
8일 범어사 화엄전에서 만난 무비 스님은 "우주의 모든 존재가 부처님이자 신이자 하나님, 보살입니다. 함부로 사람만 주인이라 할 수 없는 것이죠. 이런 사실을 알면 모든 사람과 사물을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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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최초 화엄경 강설본 펴낸 무비스님
- (부산=연합뉴스) 공병설 기자 = 국내 최초의 화엄경 강설본을 펴낸 무비 스님(71·동화사 한문불전승가대학원장)이 8일 부산 범어사에서 화엄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014.4.8 <<문화부 기사 참조>> kong@yna.co.kr
태평양처럼 넓은 화엄의 안목으로 보면 서로를 이해하고 위해줄 수밖에 없으며, 탐욕이 들어설 자리도 없다는 것이다.
무비 스님은 모든 사람이 본래 부처라는 인불사상을 특히 강조한다.
"부처님이 수많은 중생을 제도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스스로가 부처란 사실을 일깨워줬을 뿐입니다. 모두가 부처인데 누가 누구를 제도한단 말입니까?"
1958년 범어사에서 여환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무비 스님은 월정사 탄허 스님에게서 화엄경을 배워 그 강맥(講脈)을 잇고 있다. 통도사·범어사 승가대학장, 조계종 승가대학장, 조계종 교육원장 등을 지냈다.
무비 스님은 올해부터 매년 8∼10권씩 2022년까지 80권본 '화엄경 강설'을 완간할 계획이다.
화엄경 80권본은 7처(설법 장소), 9회(설법 모임수) 39품으로 구성돼 있다. 이 가운데 이번에 1차로 출간된 것은 '세주묘엄품'(世主妙嚴品) 1∼5권이다.
세주묘엄이란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것이 세상의 주인으로서 아름답게 장엄한 모습이라는 뜻이다. 세주묘엄품은 법회에 모인 410명의 대중이 부처의 지혜와 공덕, 자비와 원력, 신통과 교화를 찬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무비 스님은 책에서 '구류동거일법계 자라장리살진주'(九類同居一法界 紫羅帳裏撒珍珠)란 선게(禪偈)를 소개한다. 이 세상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존귀하고 소중하기에 어떤 차별도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무비 스님은 대승불교를 자처하는 한국 불교에 따끔한 일침을 놓았다.
"현재 한국 불교가 보이는 행태는 80∼90%는 영락없는 소승불교예요. 자비행과 보살행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힐링, 마음다스림 같은 말이 유행처럼 인기를 끄는 것도 이해가 안 됩니다. 정말 열심히 자비를 베풀고 봉사를 하다 보면 그런 거 할 겨를도 없습니다."
스님은 10여년 전 척추 수술을 받다가 신경을 다쳐 한동안 하반신 마비 상태였다가 이제는 지팡이를 짚고 거동할 정도로 회복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난 뒤에는 '조계종 막가파'란 얘기를 들은 정도로 입바른 소리를 해댄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너는 절밥 안 먹냐'는 항의전화도 오더군요. 그런데 바다 같이 넓은 화엄의 세계를 헤엄치다 보니 이제는 좀 너그러워졌습니다."
화엄경 중에서 무비 스님이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봉행불교 상섭심'(奉行佛敎 常攝心)이다. 불교를 받들어 행하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가 그렇게 좋아하는 화엄 정신을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할 수 있는지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현실을 생각하면 솔직히 절망스러울 때도 있죠.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상을 맑게 하려는 작은 샘물이 있다면 희망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화엄경이 그런 역할을 했으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4/04/08 13:43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