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대하사극 '정도전'서 이인임 역…"셰프의 마음으로 정성껏 요리"
"정치 꿈? 없죠…배우의 힘은 정치권력 뛰어넘어"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5개월 전 배우 박영규(61)의 절치부심이 100% 적중했다.
"'정도전' 대본을 보니 이인임 역이 운명적으로 다가왔어요. 모처럼 연기를 제대로 한번 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죠. 연기라는 게 어떤 것인지 보여줄 기회인 것 같아요."
박영규는 지난해 10월 연합뉴스와 인터뷰 당시 MBC 일일극 '오로라 공주'에서 갑작스럽게 하차하고 KBS 1TV 대하사극 '정도전' 촬영을 앞두고 있었다.
극 중 고려 말 권문세족인 정치 고수 이인임 역에 캐스팅된 그는 "이인임은 정도전과 대립하며 갈등을 유발하기 때문에 주요 인물이 거쳐 가는 임팩트 있는 역"이라며 "허술한 악역이 아닌 만큼 어깨가 무겁다"고 강한 의욕을 보였다.
최근 종로구 수송동에서 다시 만난 그는 어느덧 '정도전' 인기의 일등공신으로 꼽히며 호평 속에 퇴장을 앞두고 있었다.
"제 안의 구석에 차 있던 연기의 한을 풀었어요. 그간 보여주지 못한 걸 다 쏟아부어 여한이 없습니다."
이 드라마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는 시기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의 이야기로, 역사적인 고증과 감각적인 재미를 엮은 정통 사극으로 평가받으며 시청률 16%로 동시간대 1위에 올랐다.
박영규는 수구세력의 정점에 선 권모술수의 대가이면서 정치 혜안(慧眼)이 있는 이인임을 설득력 있는 악역으로 그려내며 주인공을 넘어선 반향을 일으켰다.
지난 22일 방송에서는 이인임이 이성계(유동근 분)와 최영(서인석)의 협공에 축출돼 귀양 가는 장면이 그려졌다. 이인임은 귀양 길에서 만난 정도전(조재현)에게 "거자필반(去者必返)이라는 말도 있다. 떠난 사람은 반드시 돌아온다"며 정계 복귀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욕심을 드러냈다.
이인임의 정치 생명이 막바지에 달하자 "그동안 '대하사극 이인임'을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도전'이 연말 직전에 방송됐다면 연기 대상은 박영규에게 돌아갔을 것이다'란 댓글이 올라왔다.
국회의원 출신 박찬종 변호사는 지난 15일 트위터에 "고려는 그쯤에서 망해야 했고 이인임은 수구 부패의 괴수로 잔인하고 경박한 인물인데, 그가 타락한 권력자지만 눈여겨볼 매력있는 인물로 그려낸 박영규 선생의 연기에 박수를 보냅니다"란 글을 올렸다.
이날 박영규와 함께 주한일본대사관 앞을 지나자 전경들이 "연기 잘 보고 있다"며 반갑게 인사했다.
"요즘 청년들이 더 좋아해요. 얼마 전 길에서도 한 젊은 친구가 '아저씨, 진짜 이인임 같아요'라더군요. 그래서 '이인임, 실제로 본 적 있느냐'고 묻자 '아니요. 그런데 진짜 이인임 같아요'라고 해서 기뻤어요. 하하."
사실 박영규도 처음엔 이인임 역을 제안받고 '어떤 인물이지?'라고 생각했다. 역사적인 인물 중 생소한 이름이었다.
그는 "대본 세 개를 받아 읽었는데 고려의 실질적인 정권을 잡은 이인임의 캐릭터가 운명처럼 다가왔다"며 "이인임의 기질, 민족적인 역사관 등 나와 비슷한 구석도 있었다. 교만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연기 폭이 넓은 사람이 해야 하는 역이었고 딱 내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SBS 시트콤 '순풍 산부인과'의 '미달이 아빠' 역을 제안받았을 때처럼 재지도 않고 바로 강병택 PD에게 출연 의사를 밝혔다. 정현민 작가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박영규 씨의 연기 폭발력을 생각 못했는데 200%의 연기력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인임을 대한 자신의 연기 열정을 진실한 마음으로 요리하는 셰프에 빗댔다. 셰프가 건강한 요리를 정성껏 만들어 대접하면 손님은 그 맛과 정성을 안다는 것이다.
"대본이 나오면 '어떻게 요리할까' 셰프의 마음이었어요. 요리할 거리가 무궁무진해서 '시청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맛있는 음식을 대접할까' 생각했죠. 질곡의 세월 동안 제 인생의 창고에 꼭꼭 숨겨 둔 재료를 풀어냈어요. 심지어 지난해 12월부터 캐릭터의 느낌이 깨질까 봐 친구도 안 만났고 대본 연습, 촬영장에 한 번도 늦은 적이 없죠. 마누라도 제 연기에 소름이 끼쳐 무서웠대요."
이인임의 문중에서는 방송 초반 이인임이 악역으로 그려지는 데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고 한다. 그는 "20회가 나갈 즈음 역사탐방 프로그램에서 촬영을 나가자 버선발로 맞았다더라"고 웃었다.
그는 이성계, 정도전, 최영이 아니라 이인임이란 역사의 인물을 새롭게 조명하는 데 일조한 점을 뿌듯해했다.
"역사에서 각인되지 않은 인물이 정도전, 이성계와 싸우는 과정이 신선해 시청자들에게 대리 만족을 줬을 겁니다. 역사란 승자가 걸은 길이 옳은 것이니 이인임 역시 패배했기에 악역으로만 기록에 남았을 겁니다."
이인임이 노채(폐결핵)로 투병하며 각혈을 하는 장면에선 자신의 젊은 날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도 29살 가난한 연극배우 시절 폐결핵에 걸려 2년간 투병하며 생사를 오간 적이 있다.
"당시 몸무게가 42㎏까지 줄었는데 보건소에 가서 약 먹고 주사 맞아도 안 되니 어머니가 개고기, 뱀 등 몸에 좋다는 걸 다 먹여서 살렸어요. 이때 정말 피를 많이 토했죠. 이 역시도 이인임과의 인연이죠."
이인임이 내뱉은 '촌철살인'의 명대사는 지금의 정치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치하는 사람에게는 적과 도구, 딱 두 부류의 사람만 있다", "정치인의 허리와 무릎은 유연할수록 좋은 법", "내가 하루를 먼저 죽는 것보다 권력 없이 하루를 더 사는 게 두렵다", "나라 차원의 공짜 쌀(구휼미)은 더 이상 안된다.(중략) 공짜도 반복되면 권리가 된다", "힘없는 자의 용기만큼 공허한 것도 없다. 세상을 바꾸려거든 힘부터 길러라"….
박영규는 이인임이 단편적인 악역에 머물지 않은 건 10년간 새누리당과 민주당을 오가며 국회의원 보좌관을 지낸 정현민 작가의 현실 정치 경험이 필력에 잘 녹아났기 때문이라고 치켜세웠다.
가장 와 닿은 대사는 "내가 하루를 먼저 죽는 것보다 권력 없이 하루를 더 사는 게 두렵다"라고 한다.
"배우도 마찬가지예요. 시청자들의 사랑으로 사니 하루 먼저 죽는 것보다 빌빌대는 배우로 하루를 더 사는 게 두렵죠. 그러려면 많은 사랑을 줄 때 사사로운 욕심을 내지 않고 마음을 다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인임을 마치면 바로 이 역에서 빠져나올 겁니다. 또 하나의 인물을 만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하니까요."
실제 정계 진출에 대한 꿈이 있느냐고 묻자 손사래를 쳤다.
"절대 없어요. 배우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정치권력을 뛰어넘는다고 봐요. SBS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와 주인공 김수현이 13억 중국을 움직이잖아요. 정치인이 못하는 부가가치를 창출하니까요."
그는 '정도전'을 찍으며 스케줄을 쪼개 '별에서 온 그대'에도 깜짝 등장했다. '동의보감'을 지은 허준 역으로 출연한 그는 도민준(김수현)이 조선시대에 살 당시 비소 중독으로 의식을 잃자 치료하는 연기를 했다. 인터넷에선 박영규가 실제 박물관에 있는 허준의 영정 사진과 닮았다며 '도플 갱어'란 말도 나왔다.
그는 "후배들이 잘나가는 드라마이니 도와달란 말에 밤을 새워가며 촬영했다"며 "이 드라마도 김수현, 전지현 두 후배가 연기를 잘했으니 뜬 것이다. 천송이가 딱 전지현 것이었듯이 이인임도 딱 내 것이었다. 배우로 이런 역할을 만나는 건 천운"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도전'에서 이인임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때까지 최선을 다해 마무리하겠다고 강조했다. 지금도 한 주 전에 나오는 대본을 받아 읽을 때마다 가슴이 설렌다는 그는 "역할을 사랑하니 안 외우려 해도 대사가 외워진다"고 말했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마치 시작처럼 연기를 대하는 남다른 이유를 털어놓았다. 2004년 3월 미국 유학 중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외동아들 때문이다.
"전작인 '보스를 지켜라', '백년의 유산' 등 작품이 잘 될 때마다 아들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빠가 배우로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으니까요. 연기는 얼마만큼 진정성을 갖고 그 배역에 들어가느냐인데 아들 덕에 사사로운 욕심이 없으니 '정도전'에서도 통한 것 같아요."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4/03/24 07:15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