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대 아이돌 그룹 H.O.T 출신…90년대 문화 아이콘
데뷔 18년, 인생 '2라운드' 시작…"노래하는 프로듀서가 꿈"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1996년 그룹 H.O.T의 등장은 지금의 아이돌 르네상스를 이끈 촉매제였으며 K팝 열풍의 시발점이었다.
18년이 흘러 이들은 '1세대 아이돌 그룹'으로 불리지만 국내 팬덤(열성적인 팬 집단) 문화의 위력을 보여주고 한류의 불씨를 확인시켜줬다는 점에서 가요사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1990년대 문화를 조명하는 흐름에서 이들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H.O.T는 '아이돌 산실'인 SM엔터테인먼트의 첫 성공작이었다. 이 팀의 메인 보컬이던 강타(본명 안칠현·35)는 여전히 SM에 몸담으며 직원들 사이에서 '안(칠현) 이사'로 불리고 있다.
최근 청담동 SM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 2시간 동안 지난 18년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2~3년 만의 인터뷰라는 그는 "H.O.T는 내게 추억"이라며 "추억을 먹고 살아도 젖어 살기는 싫다. 그때의 내가 있었고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의미다. 좋은 추억이라고 여기지 않으면 지금의 내가 잘하고 있지 못하단 생각에 스스로 작아질 것 같다"고 웃어보였다.
강타에게 1994년 겨울은 잊을 수 없는 해다. 오금중학교에 다니던 그는 친구 둘과 팀을 짜 비디오테이프를 만들었고 10여 군데에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그러나 중학생이 가수를 하겠다고 하자 기획사들은 코웃음을 쳤다.
포기하려던 찰나, 강타는 핑크색으로 된 SM 명함 두 장을 잇달아 받았다. 한 장은 롯데월드에서 만난 SM 직원이 '가수 할 생각있냐'며 건넸고, 한 장은 오금중 동창이 '오디션을 봐 보라'며 손에 쥐어줬다.
당시 SM은 현진영을 키워냈고 '그대의 향기'로 한창 인기를 끌던 유영진이 소속된 회사였다. 게다가 가수와 MC로 유명한 이수만이 대표이니 믿음이 갔다.
강타는 명함을 들고 송파구 석촌동 4층짜리 연립 빌라에 있는 SM을 찾아갔다. 춤을 선보이자 유영진이 뱅크의 '가질 수 없는 너'를 불러보라고 했다. 오디션에 합격한 그는 무대 경험을 쌓도록 먼저 유영진의 '너의 착각' 때 백댄서로 서게 됐다. 이수만 대표를 처음 만난 건 이때 연습실이었다.
"안경 좀 벗어볼래? 흠, 그래 같이 해보자. 그런데 너 나중에 인기 좀 얻는다고 매니저 무시하지 말고, 어디 가서 여자 막 만나지 말고, 마약 하지 말고…."(이수만)
강타는 "그때 인성을 강조한 이 말씀이 내게 큰 자극이었다"며 "지금까지도 내 가수 인생의 잣대"라고 말했다.
이미 SM에는 한배를 탈 토니안, 장우혁, 문희준, 이재원이 연습생으로 있었다. 총 8명의 연습생 중 몇 명이 나가고 남은 다섯이 H.O.T가 됐다.
데뷔곡을 받아들고는 꽤 충격이었다. 유영진이 작사·작곡한 갱스터 랩인 '전사의 후예'였다.
"당시 서태지와아이들 선배님이 갱스터 랩인 '컴백홈'으로 포문을 열었지만 제가 이런 곡을 부를 날이 올지 몰랐어요. 흑인 음악을 하고 싶었으니 원하던 스타일이었지만 예상보다 더 강한 곡이었죠. 대중성이 없어 'KBS '가요 톱 10' 10위 안에 들 수 있을까, 방송사 심의에 걸리진 않을까'란 의문이 들었어요."
첫 활동은 5개 도시를 도는 한국이동통신 주최 '삐삐 012 콘서트'의 오프닝 무대였다.
"대전, 부산, 광주 등지를 도는데 우리 무대 때 아무도 안 쳐다보더라고요. 주저앉고 싶었죠. SM이 당시 (서초구 반포동) 서래마을로 이사를 갔는데 어느 날 사무실 앞에 '012 콘서트'를 봤다며 팬 두 명이 찾아왔어요. 그때 '우리 정말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죠."
반전은 이후 시작됐다. 정식 데뷔인 1996년 9월 7일 MBC '토요일 토요일 즐거워'였다. 그 주 목요일에 녹화하고 토요일에 방송이 나가자 일요일 SBS '인기가요'에 팬들이 몰려왔다. 매니저들은 멤버들이 들뜰까 봐 "(유)영진이 형 팬들이 대신 와준 것"이라고 둘러댔다.
다음 날인 월요일 강타는 학교를 가려고 집 문을 연 순간 깜짝 놀랐다. 여학생 20여 명이 있었다. 이때 데뷔 후 처음으로 사인이란 걸 해봤다. 등굣길에 지나가는 버스 안의 여학생들도 그를 알아봤다. 교실에 들어서자 칠판은 온통 H.O.T에 대한 낙서로 가득했고 책상에는 '강타 오빠 사랑해요'란 글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하루 전까지 평범한 학생이었으니 '꿈인가, 생시인가' 했다"며 "자고 일어나니 사람들이 날 알아보는 게 신기했다.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고 웃었다.
이때부터 H.O.T의 질주가 시작됐다. 데뷔한달 만에 팬레터가 하루 세 포대씩 밀려와 1주일만 분류하지 않으면 사무실 창고를 가득 메웠다. 당시 인근 우체국에는 H.O.T 용 전용 포대가 있었을 정도. 1996년 12월 '인기가요'가 열린 강서구 등촌동 공개홀 도롯가에는 50m 넘게 팬들이 줄을 섰다. TV를 틀면 나온다고 '수도꼭지'라고 불렸다.
'전사의 후예'·'캔디'(1집·1996)를 시작으로 '늑대와 양'(2집·1997), '열맞춰!'(3집·1998), '아이야!'(4집·1999), '아웃사이드 캐슬'(5집·2000)까지 '빅히트'를 했다. 팬클럽인 '클럽 H.O.T' 정식 회원만 10만 명을 훌쩍 넘었다.
이들의 2집 때인 1997년 젝스키스가 등장하자 둘 팬덤 간의 경쟁이 과열됐다. 1998년 골든디스크 시상식 대상을 놓고 두 팬클럽 간의 충돌은 '팬클럽 대첩'으로 전설처럼 내려온다. 그러나 그해 김종환의 '사랑을 위하여'가 대상을 차지해 두 팬클럽이 '멘붕'(멘탈 붕괴)된 사건은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7'에도 등장했다.
1999년 H.O.T는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4만여 명 규모로 4집 기념 콘서트를 열었다. 흰색 풍선을 흔들며 열광하는 소녀 팬들의 모습에 '백색당 전당대회'란 말도 나왔다. 당시 사회면에는 'H.O.T 공연 도중 여학생 2백여 명 실신', 'H.O.T 여고생 팬 멤버부상 비관자살' 등의 기사도 났다. 문희준이 공연 도중 부상을 당하자 흥분한 팬들의 불상사였다.
국내의 열기는 인근 국가로도 번졌다. 당시 클론이 대만에서 뜨자 현지 락레코드에서 H.O.T의 프로모션을 하고 싶다고 요청해왔다. 이들은 2년간 대만에서 방송, 잡지 등의 프로모션을 했다. 대만 내 인기 바람은 중국으로 넘어갔다. '캔디'에 열광한 중국 팬들은 대만 활동 영상을 찾아보며 3개월 만에 크게 불어났다. 2000년 2월에는 중국 베이징에서 1만여 명 규모의 첫 공연도 열었다.
강타는 "나중에 알았는데 1998년 소속사가 중국 우전소프트와 계약하고 베스트 음반을 만들어 현지 나이트클럽 등지에서 이미 오프라인 홍보를 했더라. 한번도 가지 않았는데 중국 팬들이 생겨난 건 이러한 프로모션 덕이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듬해 팀이 해체되며 중국 활동을 이어가지 못한 건 아쉬워요. 우린 문만 열고 빠진 격이니까요.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등의 후배들이 수월하게 활동하도록 길을 닦아놓지 못했으니까요."
2001년 2월 H.O.T의 잠실 올림픽주경기장 공연 |
2001년 H.O.T 해체 반대를 외치는 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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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2월 H.O.T는 올림픽주경기장에서 한 번 더 공연했다. 그리고 그해 해체됐다. 멤버들 간 불화설도 흘러나왔다.
강타는 "불화보다 오해였다"며 "3집 때부터 우린 음반 프로듀싱에 참여하고 5집에선 곡을 다 썼다. 각자 프로듀싱, 마케팅 등 음악 비즈니스에 대한 마인드도 생겨났고 멤버 간 계약 기간이 달라 오해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멤버들끼리 술잔을 기울이며 돈독하게 지낸다"고 말했다.
끝내 강타와 문희준은 SM에 남고 토니안, 장우혁, 이재원은 SM을 나가 2001년 그룹 JTL을 결성했다.
강타는 해체 후의 허탈감은 1년 뒤에 밀려왔다고 했다.
"제가 속한 그룹이 없다는 것, 중국에서 새 시장을 봤는데 활동하지 못한다는 허탈감이 1년 뒤에 왔어요. 해체 후 제 위치에 대한 오류를 범한 것도 있고요. 솔로 데뷔곡 '북극성'(1집·2001)이 H.O.T의 후광으로 58만 장이 팔렸지만 무대에 설 때면 한창 인기이던 god 다섯 멤버에게 안 되겠더라고요. 이듬해 2집을 내면서 'H.O.T의 인기가 내 것이 아니었다'는 걸 느꼈죠."
올해 들어 god, 플라이투더스카이 등 여러 그룹들이 재결성 움직임이 있으니 H.O.T의 가능성도 물었다.
그는 "함께 논의한 적은 있지만 서로 일정을 맞추는 것 자체가 어렵더라"며 "몇몇은 이제 후배들을 키우는 '사장급'"이라고 웃었다.
그 역시 SM을 떠날 고민을 한 적도 있다.
"2003~2004년 제게 몇 곳에서 투자 제안이 왔죠. 뮤지션으로 자리 잡으려면 제 능력의 크기를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을 때였어요. 인생의 갈림길이었지만 이수만 선생님이 '하고 싶은 걸 모두 해보라'고 길을 열어주셨어요."
그의 꿈은 '노래하는 프로듀서'다. 솔로로는 2008년 앨범이 마지막이었지만 중국에서 연기를 하고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현재 새 앨범도 준비하고 있다. 또 엠넷 '보이스 코리아'에서 코치로 나서며 프로듀싱 역량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후배들을 뒷받침해주면서 무대에도 계속 설 것"이라며 "난 어울리지 않게 야심가다. 야심을 비전이라고 본다면 SM은 내 비전을 목마르지 않게 채워줄 회사다. 중국에서 프로듀싱 회사를 만들어 후배들을 배출하고 좋은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싶다"고 덧붙였다.
1세대 아이돌과 2세대인 동방신기, 슈퍼주니어를 거쳐 3세대인 엑소가 활동하는 시대별 차이점도 설명했다.
"저희 때는 인터넷보다 TV, 사진, 엽서 등의 시각적인 것들을 통해 다양한 세대가 오프라인에서 인기를 체감했죠. 하지만 해외시장을 넓혀간 아이콘인 동방신기는 스코어로 얘길 했고, 엑소는 이미 열린 시장을 잠식하는 힘으로 진화를 보여줬어요."
그는 후배들을 지켜보며 인생의 '2라운드'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군 제대 후 2라운드가 이미 시작됐다"며 "군대에서 인생을 돌아보니 감사한 것도 많았고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도 생겼다. 이때의 생각들이 2라운드를 시작하는데 동기 부여가 됐다"고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이돌이란 생각으로 살고 있을까.
"아이돌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버릇처럼 묻어 있나 봐요. 이제 어려보이는 게 미덕이 아니란 걸 알지만, 저도 모르게 의상, 머리를 할 때면 그런 스타일을 찾게 되더라고요. 하하."
"내 인생의 한 곡을 꼽아달라"고 하자 주저 없이 H.O.T 3집 수록곡 '빛'을 꼽았다. 그가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등록한 첫 자작곡이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4/02/24 07:00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