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년간 동학 연구한 박맹수 원광대 교수
(익산=연합뉴스) 김동철 기자 = "전봉준 장군이 죽음의 공포마저 눈빛으로 제압한 강한 인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참 섬세하고 부드러운 인간이었습니다."
32년간 동학을 연구한 박맹수(59) 원광대 원불교학과 교수는 15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전봉준 장군의 인간미를 한마디로 이렇게 평가했다.
박 교수는 "전봉준(1855∼1895) 장군은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를 기리고자 두 아들과 함께 성묘를 갔고 동네 애경사에 반드시 참여해 위로·기뻐해 주고 주변 사람들을 위해 의학처방전을 써주고 묏자리를 잡아주는 등 다정다감한 남자였다"고 설명했다.
또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걸 못 참는 성격"이라며 "1894년 정읍 고부봉기 때도 자신이 고부 군수 조병갑에게 당했다기보다는 학정에 시달리는 주민을 대표해 진정서를 작성했다"고 말했다.
전봉준은 두 아내를 둔 것으로 전해진다.
첫째 부인 송씨는 농민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숨졌고 둘째 부인 이씨는 농민전쟁 당시에 생존한 것으로 알려졌다.
녹두장군으로 불린 전봉준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군을 이끌다 그해 11월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했다.
그 뒤 도망을 다니다 같은 해 12월 순창 피노마을에서 동료의 밀고로 붙잡혀 일본군에 넘겨졌다. 이듬해 4월 교수형을 당했다.
전봉준의 시신은 현재 서울 단국대 근처 야산에 버려졌다고 전해진다. 정확한 묘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전봉준은 체포 후 판사가 '윗선'을 묻자 "마땅히 시키는 대로 하려니와 당초부터 내 본심에서 나온 일로 다른 사람들과는 관계가 없다"고 진술했다.
박 교수는 이 부분이 '허위 진술'이라고 단정했다. 전봉준이 혁명의 '윗선'이자 자신을 접주(接主)로 임명한 최시형 선생을 숨기고자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동학농민혁명은 프랑스 혁명과 중국 태평천국 운동에 버금가는 세계사적 의미가 있는 민초들에 의한 혁명"이라며 "지금까지 식민사학자들이 동학농민혁명을 왜곡·축소했다"고 비판했다.
아울러 동학농민혁명은 전라도 고부에 국한된 게 아니라 조선 팔도에 거친 거대한 변혁이었다고 역설했다.
박 교수는 "19세기는 백성들이 자각해 '내 힘으로 역사를 만들어가고 바꿀 수 있다'라는 의식이 급격히 향상된 시기"라며 "민초의 힘과 민중의 성장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든 힘"이라고 혁명의 의미를 설명했다.
그는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잘 살리면 우리 사회가 건강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혁명 당시 조선 인구 1천50만명 가운데 4분의 1인 200만∼300만명이 동학에 참여했고 이 중 30만명이 희생됐다고 박 교수는 설명했다.
만약 "당시 일본의 개입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란 질문에 박 교수는 "남북분단이 안 되는 등 우리 역사가 긍정적으로 발전했을 것"이라며 "동학농민혁명에서 엄청난 희생이 있었던 만큼 우리나라의 역사교육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면서 최근 교학사 사태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동학농민혁명 전적지의 근대문화유산화, 혁명의 대하소설·대하드라마화를 꿈꾸고 있다.
현재 한의사 고은광순씨 등 여성운동가들과 함께 15권짜리 대하소설을 협업 중이다.
박 교수는 "동학혁명농민군의 명예회복이 국가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지만 동학이 꿈꾸던 세상이나 동학 정신과 사상의 복권은 요원한 상태"라며 "혁명의 정당한 평가와 올바른 인식 확산을 위해 여생을 바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박 교수는 원불교 교무를 꿈꿨으나 1983년 장교 복무 시절에 광주민주화항쟁 사실을 알면서 부채 의식과 역사 지식의 빈곤함을 느껴 동학을 공부했다.
현재 '일본의 양심'으로 불리는 나카츠카 아키라 교수 등 일본 시민운동가들과 함께 매년 동학농민혁명 전적지를 답사하는 등 한일 풀뿌리교류를 통해 동아시아와의 평화와 공생의 길을 열어가고 있다.
'해월 최시형의 초기 행적과 사상', '동학과 동학농민전쟁 연구동향과 과제', '동학의 교단조직과 지도체제의 변천' 등의 논문과 '사료로 보는 동학과 동학농민혁명' 등의 저서가 있다.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2014/01/15 08:00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