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복원 과정에 관(官)은 철저하게 배제
(파리=연합뉴스) 신창용 기자 = 국보 1호인 숭례문이 소실되기 전의 모습을 되찾는 데 걸린 기간은 정확히 5년 2개월 20일이다. 그 결과는 목격하는 그대로다.
누각 1, 2층의 단청은 벗겨져 나갔고 중앙 통로인 홍예문 천장의 단청에서는 심한 변색이 나타났다. 겨울철에 자칫 기와가 동파될 수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2003년 1월 2일 밤 프랑스 북동부 로렌 지역의 샤또 드 루네빌은 화재로 건물의 3분의 2가 소실됐다. 이 건축물의 복원 완료 예정 시기는 2023년이다.
국내 최고 문화재인 숭례문 복원 기간이 5년을 갓 넘긴 데 반해 프랑스에서는 이름마저 생소한 한 건축물 복원에 자그마치 20년의 세월을 투자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와 프랑스의 복원 방식, 더 나아가 복원 철학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지난 15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박물관 뒤편에 자리한 '프랑스국립박물관 문화재 복원 및 연구센터(C2RMF)'를 방문했을 때 그 답을 얻을 수 있었다.
1998년 12월 16일 프랑스 문화공보부 부령에 따라 곳곳에 산재해 있던 복원 및 보존 관련 연구소를 통합해 창설된 C2RMF는 총 1천219곳에 달하는 프랑스 전역의 박물관 소장품을 관할한다.
전신인 LRMF, SMRF를 포함해 1930년대 초반 이후 C2RMF의 손을 거쳐 복원된 문화재만 해도 회화 작품이 17만 4천여 점, 조각 등 공예품이 3만 4천여 점에 이른다.
'프랑스국립박물관 문화재 복원 및 연구센터(C2RMF)'의 자랑인 루브르선형입자가속기(AGLAE) |
C2RMF는 크게 연구소와 복원실로 나뉜다. 작품에 대한 성분 분석과 원형연구 등은 과학자들이 중심이 된 연구소에서 진행한다. C2RMF의 자랑인 루브르선형입자가속기(AGLAE)도 이 연구소 지하에 있다.
이온빔을 쏘아 훼손 없이 작품의 연대는 물론 성분의 흔적을 추적할 수 있는 AGLAE는 박물관에 있는 세계 유일의 가속기다. 덩치가 워낙 커서 1988년 도입 당시 AGLAE를 먼저 지하에 내려놓고 나서 이후에 천장과 건물 상부를 쌓아올렸다고 한다.
복원실은 5개 층으로 이뤄져 있다. 1∼3층은 미술품·장신구 복원실, 4층은 섬유·카펫 복원실, 5층은 가구 복원실이다.
미술품 복원실에 들어서자 창가마다 커다란 그림 하나씩이 세워져 있고, 복원 전문가들이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C2RMF에는 현재 130점 정도의 미술품이 복원 중이다.
루브르박물관 소장품인 16세기 베네치아의 거장 베첼리오 티씨앙(1485?∼1576)의 유화 '파르도의 비너스'도 그중 하나다.
이 작품은 니스칠한 표면에 갈변현상이 일어나 C2RMF로 옮겨졌다. 갈변현상은 사과의 베어먹은 부분이 시간이 지나면 노랗게 변하는 과정을 떠올리면 쉽다.
덧칠을 거듭해 물감이 두껍게 쌓인 부분은 박락, 즉 떨어져 나갔다.
세척작업을 통해 그림의 원래 색을 되찾고 박락된 부분을 메우는 것이 바로 복원 전문가의 몫이다. 숙련되기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복원가들은 작업하는 시간보다 고민하는 시간이 훨씬 길다.
'파르도의 비너스'는 스페인 왕족이 티씨앙에게 주문한 작품이다. 흥미로운 점은 사냥하는 풍경을 그려달라는 주문에 맞춰 티씨앙이 오래전에 그렸던 그림 왼편에 종이를 덧대 사냥하는 장면을 삽입했다는 것이다. 이 작품(가로 385㎝× 세로 196㎝)의 가로 길이가 세로보다 기형적으로 긴 이유다.
티씨앙의 원작품과 덧댄 부분은 재질이 달랐고 그린 시기도 달랐다. 당시에는 감쪽같았겠지만 지금은 맞닿은 부분이 일종의 띠처럼 불거져 흉물스럽게 변했다.
그러나 이 작품을 담당한 복원 전문가인 클레리스 델마스는 이 부분에 손을 대지 않을 계획이라고 했다. 이 그림의 제작 과정을 식별할 수 있는 중요한 흔적이기 때문이다.
'파르도의 비너스'는 현재 복원 중간 단계다. 앞으로 3년간 더 복원 작업이 진행된다. 2010년에 이 작품이 C2RMF로 옮겨졌으니 복원에 꼬박 7년여의 시간을 들이는 것이다. 유화 한 작품 복원 기간이 우리나라를 대표한다는 숭례문 복원 기간보다 더 길다.
미술품 복원실 위층에서는 프랑스 왕 루이 16세의 부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의뢰해 제작된 자개 책상이 분해돼 작업대에 올려져 있었다. 옻칠한 부분에 묻은 때를 제거하고 특유의 광택을 되살리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자개 장식이 떨어져 나간 부분은 일절 손을 대지 않았다. 왜일까?
해당 복원 전문가인 마크 앙드레 뿔랑은 "아마 한국을 포함해 아시아에서는 자개 장식이 떨어져 나간 부분을 복원해서 채워넣을 것"이라며 "장인적인 것을 추구하는 아시아와 달리 복원 윤리를 중시하는 프랑스에서는 이것도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서 채우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옻칠한 부분은 광택을 잃으면 본연의 기능이 상실되기 때문에 옻액으로 채워넣지만, 일부 떨어져 나간 자개 장식은 역사의 흐름을 보여준다고 보기 때문에 내버려둔다는 설명이다.
단순히 작품을 원형 그대로 되돌려놓는 것만이 복원사의 역할은 아닌 셈이다.
이들은 복원 처리가 최소한도에 머무를 때 문화재의 '진정성'이 오히려 더 살아난다고 본다.
'프랑스국립박물관 문화재 복원 및 연구센터(C2RMF)' 가구 복원 전문가인 마크 앙들레 뿔랑(왼쪽)이 복원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
이들이 철저하게 원칙으로 삼는 것은 1964년 제정된 국제협약인 베니스 헌장이다.
베니스 헌장은 문화재 복원의 본질적 의미에 대해 "문화유산은 원칙적으로 보전·보호돼야 하고, 복원은 예술적 가치와 역사적 가치를 높이는 측면에서만 가능하며, 훼손된 부분을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고증해 잃어버린 모습을 원래대로 되돌림을 회복해 그 가치를 높이는 것"이라 하고 있다.
이 헌장을 복원 현장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철저하게 지키려고 노력하는 곳이 바로 C2RMF를 비롯한 프랑스 문화재 복원 기관이다.
프랑스국립문화재학교(INP)나 프랑스 팡테옹 소르본 파리 1대학 등과 같은 문화재 보존·보존 복원 전문가 양성기관에서도 강조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들 기관에서는 실기 능력 배양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인문학적 소양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INP 같은 경우 월·화·수요일은 복원 윤리 이론수업을 진행하고 목·금요일 이틀만 복원 실기를 가르친다.
숭례문에서 부실 복원의 징후가 발견되자 프랑스에서는 이와 관련한 세미나가 몇 차례 열렸다. 참석자들이 궁금해했던 것은 단 하나였다고 한다. 국가를 대표한다는 문화재를 왜 그렇게 빨리 복원했느냐고.
파리 1대학에서 문화재 보존 처리학 박사과정을 밟는 정수희 씨는 "우리나라와 프랑스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문화재 복원과 관련한 의사결정이 전적으로 복원 전문가와 박물관 학예사에 의해 이뤄진다는 것이다. 관(官)은 일절 개입하지 않는다"면서 "복원가들이 사심 없이 후세대를 생각하며 문화재 복원에만 전념할 수 있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정씨는 "이는 우리나라의 이명박 정권이 숭례문이 화재로 소실되자 부담을 덜고자 임기 내 복원을 목표로 속도전을 펼친 것과는 대조적"이라면서 "관(官)이 문화재 복원을 주도할 때 얼마나 참담한 결과를 낳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숭례문"이라고 지적했다.
※이 기사는 지난 10-20일 프랑스에서 진행된 한국언론진흥재단 주관의 'KPF 디플로마-문화재 보존과 복원' 과정을 통해 작성됐습니다.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2013/11/21 10:10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