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혜빈 기자/스포츠닷컴]
- 정상래 단장 소리 공연 유투브
- 한(恨)이 혼(魂)을 부르다!
- 총 8권에 이르는 대하소설, ‘토지’와 ‘태백산맥’의 맥을 잇는 21세기 대한민국 문학계에 우뚝 솟은 ‘경지’!
이 작품의 가치는 한 여인의 일생을 통해 한국 근대사에 담긴 비극의 의미, 당시의 문화와 사상을 한눈에 들여다본다는 데 있다. 철저한 고증과 자료수집으로 사실성과 신뢰성을 높였으며, 맛깔 나는 전라도 사투리와 ‘남도의 소리’, 쉴 새 없이 등장하는 순우리말이 주는 ‘읽는 재미’ 또한 만만치 않다.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불과 수십여 년 전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여성에게 혹독한 삶을 강요했던 시대 상황 하에서, 우리 여인네가 한恨의 정서를 어떠한 방식으로 승화시켰는지 지켜보는 데 있다. 독자들이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의 어머니요 누이이자 연인이었던, 가혹한 비극의 역사를 견디게 한 근저根底가 되어준 그들의 삶에 경의와 찬탄을 보낼 수밖에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저자는 평생 교육자의 길을 걸어왔고 2012년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을 했다. 교육 분야에서의 수많은 수상 경력은 그가 얼마나 올바른 교육자의 위상을 보여주었는지를 알려 준다. 하지만 그만큼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이 혼신을 다한 소설 도서출판 행복에너지 (대표 권선복 ) 에서 야심작으로 발간한 대하소설 ‘소리’의 집필이었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의 세월, 틈틈이 원고를 쓰고 자료 수집 차 소설의 배경인 ‘보성’ 일대를 수십 차례 방문하여 소설을 완성했다. 총 8권에 이르는 대하소설 ‘소리’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독자는, 저자의 피땀 어린 노고와 열정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쏟아져 나오는 책은 많지만 읽을거리가 없다고 탄식하는 독자들이 많다. 그렇다면 조선시대부터 근대 한국사까지 펼쳐진 우리 한의 정서에 관심이 있다면, 대하소설의 참맛에 대해 잘 있고 있다면, 정말 제대로 된 작품을 읽어볼 요량이라면 이 소설은 독자를 위한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이자 생을 관통하는 화두가 되어 줄 것이다.
출판사 서평
한반도, 한민족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한恨의 정서
흔히들 한민족의 정서는 한恨의 정서라 일컫는다. 지정학적으로 끊임없이 외세에 시달려야 했던 한민족에게 어쩌면 ‘삶이 한스럽다’라는 말은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지금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강성대국이 되었지만 불과 수십여 년 전만 해도 한반도는 ‘남의 땅’이었다. 현 세대는 풍족한 환경에서 어려움 없이 살아가지만 그 시대를 결연한 의지와 각오로 견디어 온 선조들이 있기에 이 모든 혜택을 누릴 수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당시 그 누구라도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지만 우리 여인네에게 지워진 멍에는 상상 이상으로 가혹했다. 온갖 핍박과 고난은 물론 사랑하는 임을 곁에 두지 못해 늘 괴로워해야 했던 여인들. ‘아리랑’이 우리 대표 ‘소리’인 까닭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여기 그 가혹한 삶을 온몸으로 받아낸 여인이 있다. 임을 향한 애정과 헌신 하나로 모든 고난을 감수해야 했던 여인. 뼛속까지 사무쳐 오는 한을 ‘소리’로 승화시키고자 몸부림쳤던 여인. 대하소설 ‘소리’(제1부 - 혼이 한을 부르다)는 주인공 ‘성요’의 일생을 통해 한민족의 정서를 관통하는 한의 맺힘과 풂, 수백 년 지속되어 온 갈등과 그 화해의 웅장한 서사시를 그려내고 있다.
<1권의 줄거리>
때는 1925년. 전남 보성 호음동에 사는 허순은 혈혈단신으로 일본으로 가 고학으로 대학에 합격한다. 문중은 물론 고을의 기대를 한 몸에 받게 된 그는 부모님의 편지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한창 공부에 집중해야 할 시기에 그는 청천벽력과 같은 요구를 부모님께 받는다. 두 집안의 이해관계가 얽힌 정략결혼, 그의 나이 겨우 열여덟일 때의 일이다. 상대 집안은 고을에서 제일가는 부잣집이자 명문가. 원치 않았던 결혼이었고 더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두 집안은 서로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는 앙숙이었고 그 골은 수백 년이 될 만큼 깊었다. 하지만 재물과 벼슬이라는 서로의 이해가 맞아떨어지고 공부에 대한 욕심이 컸던 순의 수락으로 결혼은 성사된다.
그의 아내가 된 성요는 부엌이 어디에 있는지 모를 만큼 귀하게 자란 부잣집의 셋째 딸이다. 용모 또한 수려하고 당시 여자의 신분으로는 어림도 없었던 높은 학식을 쌓았다. 그녀 역시 어른들의 강요에 의해 결혼을 하게 되었지만 남편 ‘순’을 향한 애정은 남달랐다. 딸 민순이도 얻었고 남편의 변호사 시험 합격을 위해 매일 새벽 치성을 드리는 것은 물론 온갖 집안일과 견디기 힘든 농사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래도 눈앞에 없는 임을 몇 년씩 그리워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말도 안 되는 험담을 늘어놓는 시댁 인척들과 날이 갈수록 시집살이를 심하게 부리는 시어머니 밑에서 성요는 지쳐만 간다. 급기야 열사병 때문에 심하게 앓게 되고 이를 알게 된 부모님이 딸을 보러 몰래 찾아오기까지 한다. 더 이상 지켜만 볼 수 없었던 친청 부모님은 딸을 사위가 있는 한양으로 보내기 위해 수단을 강구하지만 이 역시 시어머니의 탐욕에 의해 좌절되고 만다. 그리고 한양에서 시작될 더 큰 시련이 성요를 기다리고 있는데…….
독자의 마음에 울려 퍼지는 ‘소리’가 ‘한’을 일깨우다
책의 제목이 ‘소리’인 만큼 내용 중간 중간에 다양한 남도의 ‘소리’가 소개된다. 그 과정에서 그 시절 세시풍속을 짐작케 할 만한 장면들이 사투리에 섞여 구수하게 펼쳐지고 구성진 가락이 독자의 마음에 울려 퍼진다. 주인공 성요를 중심으로 한 시대적 배경은 당시를 잘 모르는 현 세대들에게 가치 있는 사료이자 민족의 정신과 사상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위대한 자료이다.
송두리째 자신의 삶을 빼앗겼더라도 임을 향한 일편단심 하나로 묵묵히 버티는 성요의 모습은 흡사 일제 치하에서 조국을 되찾기 위해 정진했던 우리 강인한 선조들의 삶과 다름이 아니다. 또한 유기적으로 얽혀 장면 장면 펼쳐지는 노력과 좌절, 열망과 탐욕의 인간사는 책 ‘소리’가 이미 한 편의 웅장한 드라마로서 그 가치가 충분함을 입증하고 있다.
그 결말이 아름답든 비참하든 그 누구의 삶이라도 다들 제각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더없이 힘겨웠기에 작은 기쁨에 하루하루가 아름다웠던 시절을 현대인은 알지 못한다. 설사 한 줌의 희열도 느끼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다 하여도 ‘가치와 그에 따르는 열망’을 위해 평생을 살았다면 세상은 언제나 아름다울 수 있다. 지금의 대한민국에게 위대한 유산을 물려준 그 시절, 우리 선조들의 삶이 더욱 그렇다. 죽음보다 비참한 삶이었지만 성요의 ‘소리’가 감동으로 다가오는 까닭은 우리가 그들의 아들딸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소개
정상래
1950년 보성 출생
광주교육대학교 졸업
인천교육대학교 편입, 졸업
홍익대학교 교육대학원 수료
2012학년도 초등학교 교장 정년퇴임
교육연구 우수공로표창 10회
국민교육발전 공로표창 3회
우수교육활동 공로표창 27회
교단수기 최우수상 3회
홍조근정훈장
목차
제1부 한이 혼을 부르다
1. 허물어진 저승집 … 11
2. 귀국선에 몸을 싣다 … 34
3. 운명의 선을 보다 … 76
4. 입도선매의 혼인이 이뤄지다 … 90
5. 한양낭군 … 111
6. 화전놀이 … 124
7. 농부가 … 164
8. 난장과 농악놀이 … 228
9. 국화꽃이 피어도 … 273
10. 배신의 그림자 … 301
미리보기
“대사라니요 갑자기 그것이 무슨 말이다요?” 순이 토끼처럼 놀란 눈으로 방안을 휘돌아보며 물었다. “순이 너도 인자 나이가 열여덟 살잉께 장가를 가야쓰지 않겄냐? 지금 공부를 하고 있어서 그러제 니 친구들은 지금 다 장가를 갔단 말이다.”
고민 끝에 단안을 내린 사람처럼 비춰졌다. 눈두덩을 살짝 끌어당겨 덮고서 의연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결연한 의지를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하고 전혀 예감에도 없었던 말을 꺼낸 것이었다. 순은 너무 당황스러웠다. 아직껏 혼인에 대해선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관심조차도 두지 않았던 것이다. 오직 학업 외에는 그 어떤 일에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너한테 말은 안했다만 선을 보기로 했응께 같이 가야 쓰겄다.”
아버지도 어머니의 말에 은근히 맞장구를 놓았다. 그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선을 보다니요?”
“공부헌다고 해서 인륜대사를 미룰 수 있겄냐? 부모 살아있을 때 혼인을 해사제. 그래야 니 동생도 장가를 보낼 것 아니냐. 다른 생각 말고 내일 나를 따라가도록 허자.”
아버지 내심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결연한 의지가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53쪽
어머니는 부러 사위 앞에 딸 자랑을 하려 든 것 같았다. 사위에게 아내의 고마움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속다짐이라도 하라는 것으로 들렸다. 앞으로는 떨어지지 말고 함께 살아야 한다는 당부와 같은 말이었다. 남편도 장모님의 속뜻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성요의 얼굴을 바라보고 무구(無垢)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동안 고생했다는 위로의 눈빛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고마움 잊지 않겠다는 속다짐이라도 하려는 듯 속정이 도탑고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염화시중 같은 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성요도 남편의 곰살가운 표정에 아내의 연정이 가득 묻어난 발그레한 얼굴로 살포시 웃어주었다. 아버지께서는 부지불식간에 짐짓 사위의 속마음을 확인이라도 하고 싶은 것 같았다.
“이제 벼슬길로 나갈 일만 남았제.”
“예. 그리 해야지요.”
“그럼. 이제 훤한 앞날만 남았구나.”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야지요.”
“일본 유학을 마쳤으니 거리낄 것이 멋이 있겄능가?”
“시험에 합격해야 합니다.”
“시험? 무슨 시험인데?”
“갑오경장 때 없어졌던 과거(科擧)와 같은 시험입니다.”
“뭐, 과거라고 했는가?”
“예, 그와 비슷한 시험이지요.”
1894년 갑오개혁으로 폐지 된 과거시험을 설핏 떠올린 것 같았다. 아버지는 여섯 살 때부터 서당에서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읽고 썼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오직 과거시험을 준비하느라 소학이며 사서삼경을 줄줄 외웠다고 했다. 세 차례나 소과에 응시했으나 결국은 낙방했다고 했다. 그 후로 과거라고 말만 들먹여도 진절머리가 난다고 했던 것인데, 넋이 나간 것처럼 멍하니 봉화산만 쳐다보았다. 하늘에 올라가 별을 따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이 과거라고도 했다. 과거제도가 없어졌으니 시험은 없을 것이고 특히 유학까지 마치고 돌아온 유능한 사람을 높은 자리에 앉히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간에 생각한 것과는 너무나 큰 괴리가 있었음을 이제야 알아차린 것이었다. 혹시 시험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떨까 싶은 조바심에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섣부른 기대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106~107쪽
춤추는 여인 가운데에는 계군일학처럼 동백기름 반짝이는 낭자머리에 육각 족두리를 걸치고 청옥 비녀 곁에 참꽃송이를 꽂고서 궁녀같이 치장을 하고 나온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두 팔을 살포시 들어 올려 마치 천년 학이 선녀가 되려고 하늘을 향해 비상하려는 날갯짓을 하더니, 두 팔을 벌려 활처럼 둥글어지다 낭창낭창 휘어져서 부드러운 곡선의 극치를 이루기도 하고, 버선코가 살포시 들어나도록 발꿈치를 앞으로 뻗더니 두 팔을 휘젓고는 어느새 오른손으로 수건을 잡고 왼손으로 수건을 살짝 받쳐 들었다. 손목을 고이 접어 자연스러운 백학의 머리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운 곡선미를 그려내고 있었다. 수족상응(手足相應)이라 했든가. 손과 발이 어우러져 춤추는 봉황을 그려내고 있는 듯했다.
하얀 버선을 신은 발뒤꿈치를 살며시 들어 올려 산들바람에 흔들거리는 버드나무 가지처럼 몸을 흔들어대며 앞으로 나아갔다 뒤로 물러나기도 하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가며 앞으로 나아가더니 무릎을 살며시 굽힌 뒤 사뿐사뿐 돌아서는 것이었다. 긴 소맷자락을 슬그머니 들어 올려 날갯짓을 하도록 요동치는 아름다운 자태, 그녀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춤사위는 마치 하늘에서 인간 세계로 내려온 선녀가 아니고서야……. 그것은 분명 천년 학이 선녀가 되려고 하늘을 향해 비상하려는 날갯짓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팔색조 매무새에 춤을 추는 봉황처럼 예쁜 성요가 조신한 맵시로 춤을 추니 구경꾼들은 너나할 것 없이 탄성을 질렀다. 혼이 쑥 빠져나간 사람마냥 모두 다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두커니 서서 그녀를 바라보는 눈에는 넋이 나가고 없었다. 양반집 부모로부터 배운 태도에서 풍기는 여염함이 조금도 나무랄 데 없으면서도 춤으로 살아가는 당골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149~150쪽
“민순 엄마! 민순 엄마!”
넋을 놓고 불러보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올똑볼똑하기로 소문난 세동댁이 성요를 빼앗듯이 덥석 껴안고 이마에 손을 얹었다. 또 다른 손은 덜덜 떨며 손목을 추켜들고 맥을 짚었다. 그것도 부족하여 귓바퀴를 성요의 젖무덤 위에 슬그머니 올렸다. 도드라진 젖가슴 속에서는 별일 없이 맥박이 퍼떡퍼떡 뛰고 있었다. 하지만 다소곳이 밑으로 내려 뜬 성요의 눈망울을 바라본 세동댁 가슴이 철벙 내려앉은 것 같았다. 더위를 먹은 것 같은 예감이 짙게 밀려오는 것이었다. 예로부터 삼복더위를 무릅쓰면 병을 얻는 것이 으레 있는 일. 이를 서증(暑症)이라 하는데 뜨거운 햇볕 아래 노역하는 사람이 쉽게 걸리는 병이었다. 잘못했다간 인명을 상하기도 했다. 일을 해보지 않았던 그녀가 하루도 쉬지 않고 뙤약볕에서 일을 해왔으니 당연히 예견된 일이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몸을 돌보지 못한 탓도 있다 하겠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동네 아녀자들 입심에 놀아나는 것에 오매불망하며 지내온 것이었다. 이씨 집안과 혼인을 했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의 입정을 피해 갈 길이 없었다.
비난여론은 수그러들 줄 모르고 점점 늘어만 가고 있었다. 말 같지 않은 말도 자주 들으면 귀에 익듯 집안에서도 시어머니의 마음도 점점 폭이 오그라들고 있었다. 처음 시집올 때만 해도 며느리자랑에 날 샐 줄 모르더니 근자에는 간혹 성을 들먹이며 푸념을 털어놓곤 했다. 조상의 가르침 허튼 데 없는 것인데 너무 성급하게 혼인을 시켰다느니…… 땅문서에 현혹을 당했다느니…… 아들이 벼슬길에 들면 그까짓 논 몇 마지기가 뭘 그리 대수롭냐고…… 간혹 돌팔매질을 할 때가 있었다. 그것까지만 해도 괜찮은 편이었다. 진정 가슴에 맺혀드는 말은 혼인을 잘못해서 벼슬길이 막힐까 싶다는 푸념의 소리였다. 조상의 노여움을 사는 날엔 될 일도 안 된다고 안달까지 부렸다. 그녀가 새벽치성에 지극정성을 다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189~190쪽
대문을 들어선 그녀는 여느 날과 같이 아침을 짓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새벽잠이 적은 시아버지가 아침 일찍부터 아궁이 재를 다 치워놓았다. 부엌엔 땔감마저 가득 가져다 놓았다. 성요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아침을 지었다. 시부모 좋아하는 된장국이며 친정에서 가져온 마른 굴비도 숯불에 구웠다. 밥상을 차려 시부모님 앞에 조심스럽게 놓아두고 숭늉을 받쳐 들고 안방 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여태껏 도란도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며 굴비가 맛있다고 며느리를 칭찬하던 시어머니가 느닷없이 밥상을 메치는 소리를 질렀다.
“워매! 늙은 막에 며느리 눈치보고 살게 해 놈시롬 목구녁에 밥이 넘어가요? 넘어가!”
방문 창살을 내리 찍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 곁에 앉아 납죽납죽 받아먹고 있던 어린 딸이 기겁을 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시아버지는 생선살을 발라 손녀 밥숟가락에 놓아주면서 아무 말도 없이 듣고만 있었다.
“여물지도 못한 자식을 칠 년 동안이나 남의 집 머슴살이 시켰으면 허제 얼마나 더 시킬라요? 늙어 죽도록 머슴으로 놔둘라요? 배운 것도 없제, 가진 것도 없는 놈한테 어느 년이 딸을 주겄소? 떡 본 김에 제사 좀 지내려고 했더니만……. 왜 말을 못하요? 언제부터 버버리가 되었냔 말이요?”
“보내야제, 친정에서 보내온 것을 다른 데 쓴다면 짐승만도 못한 짓이제.”
그제야 시아버지가 당당하게 소신을 굽히지 않으려 들었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기세등등하며 억척스러움을 보였다.
“나는 못 보내겄소.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못 보냉께 그리 알란 말이요.”
성요는 그때서야 시어머니가 하루가 멀다고 되뇌어 온 말이 귓속에서 맴돌기 시작했다. 그 속에는 의미심장한 뜻이 담겨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니가 사람이라면 당연히 시동생부터 챙겨주자고 해사제, 너사 남편이 벼슬길에 오르면 얼굴만 쳐다봐도 배부를 것 아니냐?”
시어머니 내심엔 오직 며느리에게 하고 싶은 것은 ‘기다림’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며느리를 한양으로 보내달라고 사돈댁에서 돈을 보내오니 야릇한 탐심이 동요했던 것 같았다. 결국은 둘째 아들 장가부터 보내고 보자는 심술궂은 술수를 들고 나왔던 것이다.
293~294쪽
추천사
이인권(한국소리문화의전당 대표)
저는 문화예술 분야에서 30년 넘게 활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서울 언론사 문화사업, 수도권 최초 공공문화재단, 지역 복합아트센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조직과 지역 그리고 영역을 거치며 많은 경험을 쌓을 기회를 가졌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21세기 들어 규모 있는 시설로는 국내 최초로 건립된 ‘한국소리문화의전당’의 경영을 2003년부터 맡아 왔습니다. 돌이켜 보면 이 모든 과정은 ‘우연’의 연속이었지만 그 고리를 만드는 ‘필연’이 늘 작용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평생 예술을 기획하고 만들며 살아온 제 삶의 ‘소리’가 현재의 저를 예술경영자로서 만든 것입니다.
지금 우리 눈앞에는 한평생 또 하나의 ‘소리’를 만들어 오신 분이 서 계십니다. 바로 후학 양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셨던 정상래 교장선생님이십니다. 수만의 제자를 길러낸다는 것은 보통의 열정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자신만의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 또한 게을리하지 않으셨기에 선생님께서 우리 앞에 펼쳐놓는 소리는 웅장하고 감동적입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평생토록 만들어 오신 ‘소리’는 바로 우리의 대표적 정서인 ‘한(恨)’의 결정체입니다.
한 중에서도 가장 강한 것이 있다면 바로 구습의 틀 속에서 평생을 묵묵하게 살아가는 ‘여인네들의 한’이 아닐까 합니다. 한민족의 역사에서 여인들은 속박과 핍박 속에서도 오직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감내하며 꿋꿋하게 삶을 개척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대표 정서가 ‘아리랑’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간절히 바랐음에도 결코 뜻을 이루지 못했던 여인들은 가슴속에 얽히고 맺힌 한을 신명나는 ‘소리’로 풀어냈던 것입니다.
불과 백여 년 전 일제에 의한 국권 침탈을 당하고 6·25 전란을 겪는 동안 대한민국 여인네의 한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늘 눈앞에 없는 임을 그리워해야 했고 한편으로는 억척스럽게 삶을 꾸려 나가야만 했습니다. 개인적인 열망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 어떤 작은 소망 하나도 이루지 못한 주인공 성요의 생은 참혹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그녀의 한이 감동으로 다가오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 시대를 버티게 해준 우리의 위대한 어머니, 여인네의 피가 제 몸에도 흐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제 마음에는 그 여인, 주인공 성요의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 거대한 울림에 가슴이 뜨겁습니다. 그녀의 애잔하면서도 당당했던 삶을 구성지게 풀어낸 소설 ‘소리’는 오늘날 풍요로움에 묻혀 ‘한’을 잊어가는 세대들에게 한국의 정서와 한국인의 정감을 보여주는 귀중한 역사자료가 될 것으로 믿습니다.
출간 후기
권선복(도서출판 행복에너지 대표이사)
성경에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고 적혀 있습니다. 책이야말로 ‘지혜’라는 보물을 가득 담은 창고가 아닐까요? 출판을 해 오며 가장 기쁜 순간이 있다면 지혜라는 귀중한 가치를 담은 글을 발견할 때입니다. 출판인의 입장에서 원석과도 같은 원고를 잘 편집하여 빛나는 보석으로 세상에 내놓는 일보다 뿌듯한 순간은 없습니다. 그 순간을 위해, 책으로 행복해지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사명감 하에 설립된 도서출판 행복에너지는 대한민국 방방곡곡에 행복에너지를 전파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부단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습니다.
좋은 책을 만들어 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바다 속에서, 숲 속에서 보물을 찾아 헤매듯 수많은 원고들 중 보석 같은 글을 찾기 위해 늘 다양한 모임과 함께 열려있는 사고로 한 달 평균 이십여 편 이상의 원고를 접수하고 세밀한 검토 과정을 거쳐 두세 편 정도가 출판이 결정됩니다. 사실 정상래 선생님의 글을 처음 접했을 때에는 엄청난 분량의 원고에 선뜻 출간을 결정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문학가로서 이렇다 할 명망이 없으신 분의 글을, 그것도 열 권 분량의 대하소설을 도서출판 행복에너지에서 세상에 펴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많이 하였습니다.
하지만 원고를 읽으면 읽을수록 걱정은 환희로, 의문은 확신으로 굳어졌습니다.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진주를 덮고 있는 진흙을 손수 걷어내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렇게 애써도 찾을 수 없었던 보석이, 바로 기쁨 충만한 행복에너지로 변신하여 눈앞에 다가온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한이 혼을 부르다’ ‘소리’와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내부 회의를 수십 차례 거쳐 행복에너지에서는 8권의 대하소설 ‘소리’를 2013년 내에 출간하기로 과감히 결정하였습니다.
정상래 교장선생님은 40성상(星霜)을 후세교육에 바친 분입니다. 선생님의 고향은 유달리 소리문화가 살아 숨 쉬고 있는 곳이었다고 하셨습니다. 그중에서도 서편제의 산실이었다는 것이 너무너무 자랑스러웠답니다. 소리를 위해 살아간 선지자의 고결한 삶을 직접 듣고 자랐던 터라 그냥 묻어두기에는 너무 아쉬워 글을 쓰기로 했다고 하셨습니다. 틈나는 대로 자료를 모으고 지인들을 찾아 자문을 구한 지 6년의 세월이 걸렸고, 현지답사만도 수십여 차례가 넘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명예롭게 정년을 마치고서도 소설 ‘소리’를 원고지에 담아오셨습니다. 10년에 가까운 긴 세월동안 빚어낸 인고의 결정체를 본인에게 출판해 달라고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출판인으로 보았을 땐 이건 분명 하나의 보석이었습니다.
다이아몬드는 하루아침에 뚝딱 생겨나는 게 아닙니다. 검정 탄소 덩어리가 억겁의 시간 동안 땅속에서 고열과 어둠을 견뎌낸 끝에 찬란한 빛을 뿜어내는 ‘결정’이 됩니다. 우리 삶에서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의 시간, 그 긴 시간 동안 저자의 열정으로 빚어낸 소설 ‘한이 혼을 부르다’ ‘소리’는 세상 그 어떤 보석보다도 찬란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한 여인의 기구한 삶을 통해 지난 세기 대한민국이 겪었던 고난과 극복의 시간을, 그 한(恨)의 정서를 구성진 ‘소리’로 뽑아내신 정상래 선생님에게 힘찬 응원의 박수를 보내 드립니다. ‘가치와 철학’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모든 현대인에게 한이 혼을 부르는 ‘소리’는 흐릿한 정신을 깨우는 명징한 울림이자 어두운 미래를 밝게 비출 횃불로 다가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과 지도편달을 부탁드리며 만사 대길한 행복에너지 샘솟으시기를 기원 드리겠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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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혜빈 기자 chb050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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