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베르트 작품으로 독주회 열어…"음악이 이끄는 대로 따를 뿐"
(서울=연합뉴스) 임수정 기자 = '건반 위의 구도자' 백건우(67)의 이번 선택은 슈베르트다.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가 말해주듯 백건우는 40년이 넘는 연주 인생 동안 한 작곡가, 한 시리즈를 골라 철저하게 탐구하는 구도자적 모습을 보여왔다.
1970년대 초반 뉴욕에서 펼친 라벨 전곡 연주부터 리스트, 스크랴빈, 프로코피예프, 포레, 라흐마니노프, 베토벤 등에 이르기까지 그는 한 작곡가에 완전히 몰입해 그 본질을 기어코 끄집어 내고야 만다. 진정한 연주를 위해서는 작곡가의 내면과 완전히 맞닿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원칙.
지금 백건우의 마음에 가장 가까이 있는 작곡가는 단연 슈베르트다. 그는 오는 14일 슈베르트의 작품만을 묶어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무대에 오른다.
슈베르트의 건반곡 사이를 탐험 중인 그를 3일 서울 장충동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말투는 여전히 느리고 조용했지만 그가 신중히 골라낸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는 가늠할 수 없는 깊이와 무게가 느껴졌다. 이날도 그의 옆자리에는 '비서' 역할을 자처하는 그의 아내이자 영화배우 윤정희(69) 씨가 함께했다.
--이번 '탐구 대상'은 슈베르트인데 특별히 선택한 이유가 있나.
▲슈베르트는 청춘의 이미지와 참 잘 어울린다. 나 역시도 20-30대 젊은 시절에 슈베르트를 많이 연주했는데, 한동안 다른 작품들에 집중하느라 들여다보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 다시 슈베르트 작품들이 가깝게 느껴진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음악이 날 끄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수십 년 동안 피아노 독주회 프로그램을 많이 짜봤지만 이번이 가장 아름다운 프로그램이 아닌가 싶다. 오랫동안 베토벤, 브람스, 프로코피예프처럼 규모가 크고 드라마틱한 작품을 하다가 순수하고 깨끗한, 순진하고 맑은 슈베르트를 연주하니 정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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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프로그램은 슈베르트 작품 가운데서도 소나타가 아닌 '즉흥곡'이나 '악흥의 순간' 등으로 구성돼 있던데.
▲슈베르트를 떠올리면 아무래도 가곡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만큼 슈베르트 음악의 본질은 노래다. 그래서 피아노로 어떻게 노래 부를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일정한 형식을 따른 소나타가 아닌, 피아노 안에 노래와 시가 담긴 작품들을 고른 이유다. 난 이번 피아노 독주회가 꼭 '리더아벤트(Liederabend·가곡의 밤)'처럼 느껴진다.
이번 독주회 프로그램은 슈베르트의 '4개의 즉흥곡 D.899', '음악적 순간 D.780' 중 2·4·6번, '3개의 피아노 소곡 D.946'으로 구성된다. 백건우는 가장 아름다운 흐름으로 슈베르트를 전하고자 작품들의 순서를 재배열해 연주할 예정이다.
--청년 시절에 연주했던 슈베르트와 67세에 연주하는 슈베르트는 어떻게 다른지.
▲음악의 성숙은 설명하거나 풀이하기가 쉽지 않다. 왜 누군가의 소리 속에는 무게와 깊이가 있는데, 왜 같은 곡을 연주하는 누군가의 소리에는 내용이 없는지 젊은 시절 참 많이 궁금해했고, 그 비결을 터득하고 싶어했다. 지금 와서 보면 성숙한 소리라는 것은 어떤 음악과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고, 살아내야만 터득할 수 있는 종류인 것 같다.
--연주를 위해 늘 한 작곡가, 한 시리즈에 완전히 빠져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내가 작곡가의 내면과 완전히 맞닿아 있구나' 하는 순간이 있나.
▲어떤 작곡가의 세계가 어느 순간 딱 열리는 건 아니다. 아주 조금씩 사소한 부분들이 합쳐지고 또 합쳐져서 전체적인 그림이 나오는 거다. 그 과정 중에도 수시로 다시 어두워지고, 다시 빛이 비치기도 한다. 음악은 정말로 시간이 필요하다.
--요즘도 매일 여섯 시간씩 연습한다고 들었다. 40년 동안 지치지 않고 '탐구 생활'을 하는 그 열정은 어디에서 오는가.
▲열정을 끝까지 간직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오직 음악에만 삶을 바친다고 생각하면 또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닌 듯하다. 그리고 내 삶을 바치는 만큼 음악이 내게 주는 것이 훨씬 많다.
--피아노 연습 이외 시간에는 무슨 일을 하고 지내나.
▲예전에는 이것저것 관심사도 많았는데, 나이가 들다 보니 예전 같지 않다.(웃음) 사진 찍는 걸 여전히 즐기고 산책을 하며 휴식을 취하는 정도다. 시간이 갈수록 음악이 내게 요구하는 게 점점 더 많아진다. 음악에 쏟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질 수밖에 없다.
--독주회가 열리기 두 시간 전, 후배 피아니스트 김선욱도 LG아트센터에서 베토벤 소나타 전곡 연주 시리즈 중 7번째 무대를 연다. 이런 후배 연주자들을 보면 기분이 어떤가.
▲자랑스럽다. 콩쿠르 심사를 해보면 좋은 우리 연주자들이 무척 많다. 가능성이 크다. 넓고 긴 비전을 갖고 활동했으면 좋겠다.
--후배들에게 더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지.
▲없다.(웃음) 음악은 각자가 자신의 길을 찾아내야 한다. 가르치는 일에도 여전히 관심이 없다. 음악은 가르쳐서 되는 분야가 아니다. 물론 기본적인 부분은 배워야 하겠지만, 그 이후는 각자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진짜 예술가가 될 수 있다.
--이번 독주회 이후 탐험 예정 중인 작곡가나 레퍼토리가 있는지.
▲아무도 모르지 않겠나.(웃음) 나도 모른다. 한 작곡가가 될 수도 있고, 어떤 이미지가 될 수도 있겠지. 음악을 내가 좌우할 순 없다. 음악이 날 이끄는 대로 따를 뿐이다.
◇백건우 피아노 리사이틀 = 9월 14일 오후 7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5만-13만원. ☎ 02-599-5743.(9월 6일 강동아트센터, 9월 7일 여수 예울마루, 9월 10일 대구 아양아트센터)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2013/09/03 17:33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