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신창용 기자 = '20대 80의 사회'는 이미 철 지난 이야기다.
오늘날 전 세계 최고 부자 20명의 재산 총합은 가장 가난한 10억 명의 재산 총합과 같다. '0.1대 99.9'의 사회라고 말해야 정확하다.
이처럼 부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 간의 격차가 날로 커지는 사회에서는 불평등 구조의 희생자들 사이에서 분노의 목소리가 터져 나와야 정상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떤가? 현실에서는 불평등 구조의 희생자들이 분노하기는커녕 부자 감세와 복지 예산 삭감에 동의하는 기막힌 일이 벌어지고 있다.
세금을 깎아주고 규제를 없애 대기업이나 부자가 잘살게 되면 그 혜택이 바닥까지 적실 것이라는 '낙수효과'(Trickle Down) 이론을 들먹이면서 말이다.
'유동하는(liquid)'이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현대 사회를 분석해온 폴란드 출신 유대인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최근 국내 번역된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에서 이 기이한 현상의 비밀을 우리가 암묵적으로 수용하는 거짓 믿음들에서 찾는다.
경제성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믿음, 영구적으로 늘어나는 소비가 행복을 충족시켜줄 것이라는 믿음, 인간들 간의 불평등은 자연적이라는 믿음, 경쟁은 사회 질서의 재생산과 사회 정의의 필요충분조건이라는 믿음 등.
바우만은 이 책에서 불평등 구조에서 이익을 얻는 계층이 우리에게 심어놓은 거짓말들을 분류하고 왜 우리가 이런 거짓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면밀하게 검토한다.
"대체로 그것들은 반대와 저항의 가능성을 감소시키고 실패에의 투항과 체념의 고통을 견디기 쉽게 해줌으로써 우리가 도착점에서 만나게 되는 무시무시하게 부풀어 오른 엄청난 불평등을 감수하게 한다. 요컨대 그것들은 사회적 불평등이 변함없이 지속되고 심화하는 데 이바지한다."(88쪽)
사람들이 대기업 최고경영자(CEO)가 받는 천문학적인 액수의 보수에 대해 과도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이면에는 개인의 재능의 자연적 불평등에 대한 믿음이 견고하기 때문이라고 바우만은 지적한다.
이런 믿음들 때문에 사회적 불평등은 자신을 스스로 영속화할 수 있는 능력에다 자신을 선전하고 강화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게 됐다고 그는 말한다.
결국, 사회적 불평등의 행진을 막을 방법은 거짓 믿음의 고리를 끊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물론 패배할 가능성이 농후한데도 그는 이렇게 말한다.
"패배했다는 것이 임박한 파국에 맞서 승리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단지 무지 그리고/또는 무시로 인해 승리가 저지됐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112쪽)
바우만은 이 책에서 섣불리 희망을 노래하지 않는다. 쉽게 현실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어떤 식으로건 손쉽게 타협하지 말고 철저하게 사유하라고 강조한다.
동녘. 123쪽. 1만2천원.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2013/08/26 07:12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