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달 내한하는 '바흐 대사' 헬무트 릴링 인터뷰
"바흐는 내 인생의 이정표…바흐의 '재현'보다 '소통'이 더 중요"
(홍콩=연합뉴스) 임수정 기자 = 지난 11일(현지시각) 홍콩 셩완(上環) 지역의 작은 레지던스 호텔. 엘리베이터를 타고 맨 꼭대기 층에서 내리자 커다란 창문 밖으로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푸른 바다가 그림 같이 펼쳐졌다. 그리고 발코니 의자에 앉아 그 풍광을 바라보는 백발의 노신사. 평생을 바흐 음악에 헌신해 온 독일 지휘자 헬무트 릴링(80)이었다. "아름다운 바다와 날씨를 감상하고 있었다"며 인사를 건네는 그의 말투는 꾸밈없이 간결하고 담백했다. 바흐 음악과 똑 닮은 말투와 분위기였다.
그는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바흐라는 외길을 걸어왔다. 13년에 걸쳐 바흐의 칸타타 전곡을 최초로 녹음(1985)한 데 이어 바흐 서거 250주년이었던 2000년 바흐의 교회음악 전곡을 녹음한 172장짜리 전집을 발표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런 그에게는 '바흐의 대사(大使)'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닌다.
여든의 나이에도 그는 여전히 정력적으로 전 세계에 바흐 음악을 전하고 있다.
다음 달에는 4년 만에 한국을 찾아 바흐와 모차르트 음악을 선보인다. 인터뷰 전날 현지 오케스트라(홍콩 신포니에타)와의 공연이 밤늦게까지 있었음에도 바흐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그의 눈빛은 소년처럼 반짝거렸다.
릴링은 "바흐는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이정표"라고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바흐는 너무도 중요한 작곡가입니다. 그는 베토벤, 모차르트를 포함하는 많은 후대 음악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 바흐만큼 신앙심과 믿음을 높은 수준의 음악으로 표현해낸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바흐 음악을 전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의 이 같은 애정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것이다. 청소년기를 루터교 계열의 기숙사 학교에서 보내며 자연스럽게 종교 음악을 접했다. 학교 특성상 신학과 음악, 라틴어 등을 공부해야 했고 이는 훗날 바흐 곡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b단조 미사'나 '마태수난곡' 등을 연주할 때 종교적 틀 안에서 바흐의 본래 의도와 생각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어떤 면에서 그의 삶은 바흐의 모습과 닮아있기도 하다. 둘 다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신학을 공부했고, 오르간 연주자였으며 지휘를 했다.
바흐와 비슷한 점이 많다는 이야기에 대해 그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큰 차이가 있어요. 바흐는 작곡을 했지만, 난 그렇지 않잖아요. 난 그저 바흐의 위대한 음악에 경탄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의 음악 세계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원전연주(옛 음악을 그 시대의 악기와 연주법으로 연주하는 것)의 유행에도 당대 악기가 아닌 현대 악기로 연주하는 바흐를 고집해왔다는 점이다. 현대 악기 위주로 편성된 악단을 이끌지만, 원전연주 단체를 떠올리게 할 만큼 담백하고 정갈한 연주로 바흐의 정수를 담아낸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당대의 연주를 재현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이 유일하게 중요한 요소는 아니"라고 말했다. 이어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흐의 음악과 아이디어를 오늘날,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달하는지에 관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바흐 시대와 오늘날 관객들의 '귀'는 완전히 다릅니다. 바흐 시대의 관객에게 포르테(세게)로 들렸던 것이 오늘날의 관객에겐 메조 포르테(조금 세게)로, 불협화음으로 들렸던 것은 아름다운 소리로 들릴 수 있죠. 가사를 이해하는 수준도 완전히 다르고요. 이 때문에 바흐 시대 때의 연주를 똑같이 재현해낸다고 해도 오늘날의 관객과 과거의 관객에게는 다른 의미로 다가갈 것입니다. 당대의 악기와 연주법을 재현해내는 것보다 우리 시대의 이해와 감각에 맞는 바흐 음악을 전달하는 데 훨씬 더 관심이 많은 이유입니다."
인터뷰는 한 시간을 넘어섰지만 그의 얼굴에서 피곤한 기색을 느낄 수 없었다.
건강 비결에 대한 질문에 그는 간단명료한 답변을 내놓았다. "지휘를 하기 때문일 거예요."
옆에 있던 아내가 "(릴링은) 적포도주를 좋아하고 시가를 항상 피운다. 특별히 건강식을 챙기지도 않고, 계란 프라이를 좋아하는 정도다.(웃음) 지휘를 하며 머리와 몸을 늘 쓰기 때문에 건강을 유지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번 내한 무대에 자신이 1965년 직접 창단한 관현악단 '바흐 콜레기움 슈투트가르트'와 함께한다. 합창단은 그의 첫 내한 때 함께했던 '게힝어 칸토라이'(1954년 창단) 대신 국내 합창단(서울모데트합창단)과 호흡을 맞추기로 했다.
솔리스트로는 릴링이 직접 선택한 신예 소프라노 미렐라 하겐과 메조소프라노 김선정, 테너 조성환, 바리톤 정록기 등이 나선다. 이들은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 3번', 칸타타 '마음과 말과 행동과 생명으로', '마니피카트', 모차르트의 '환호하라, 기뻐하라' 등을 연주한다.
그는 이번 내한 프로그램에 대해 "전형적인 바흐라고 할 수 있는 곡들"이라며 "바흐를 전혀 모르는 이에게도 영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한화 클래식' 헬무트 릴링 내한 공연 = 9월 6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5만-10만원. ☎02-729-5369·070-4234-1305.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2013/08/12 09:00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