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국제도서전서 '디지털 시대, 왜 책인가?' 주제 대담
(도쿄=연합뉴스) 황윤정 기자 = 디지털 시대, 모두가 '책의 위기'를 말한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두 지성(知性)은 알고자 하는 인간의 지적 욕구가 있는 한 책의 세계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 몸과 마음, 영혼이 느껴지는 디지털 시대가 열릴 것으로 내다봤다.
이어령(79) 초대 문화부 장관과 일본의 대표적 지식인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73)가 4일 오후 도쿄국제도서전에서 '디지털 시대, 왜 책인가?'를 주제로 대담을 벌였다.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도쿄대생들은 왜 바보가 되었는가' 등의 저서로 한국 독자들에게도 친숙한 다치바나는 사회문제는 물론 우주, 뇌 등 전방위적 글쓰기와 엄청난 독서량을 자랑하는 저술가이자 저널리스트다.
대학 졸업 후 다니던 직장을 2년 반 만에 퇴사한 이유가 "책을 더 읽고 싶어서"였을 정도로 지독한 '책벌레'로도 유명하다.
다치바나는 "책을 가장 많이 읽는 사람은 책을 쓰거나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라면서 자신의 경험을 소개했다.
이달 말 또는 내달 초 상영되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작 애니메이션의 팸플릿에 실리는 2천400자 분량의 글을 쓰기 위해 "산더미 같은" 책을 쌓아놓고 읽어야 했다는 것.
다치바나는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고 책에 싫증을 내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만큼 책은 계속 나올 것"이라면서 "책을 재생산하는 과정은 한 국가의 문명을 유지하게 해 준다"고 강조했다.
이어 "책은 지식이 들어 있는 패키지"라면서 "두루마리 등 형태는 바뀌었지만 지적 세계는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인간의 뇌 형태에 맞춘 책의 세계가 이미 형성돼 있기 때문에 인간의 뇌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책의 역할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또 디지털이 책과 지식의 세계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말했다.
다치바나는 한·중·일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한·중·일 공통의 한자 800자를 만드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면서 "급속히 디지털 시대가 진행되면 한자를 외우지 않아도 소리를 입력하면 한자로 전환되는 소프트웨어가 있으면 한자를 다 읽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서양 알파벳이 26자인데 한·중·일 공통의 800자 한자가 만들어지면 800개의 문자를 자유자재로 사용해 문화를 꽃피울 수 있게 된다"면서 "아시아 문명에 큰 힘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다치바나는 마지막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첫머리에 나오는 글을 인용해 "인간은 알고 싶어한다. 더 알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이 같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 있는 한 책의 세계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고 역설했다.
이 전 장관은 몸과 마음, 영혼 등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느낄 수 있는 디지털 시대가 올 것으로 전망했다.
"80년 동안 책과 함께 살아왔다"는 말로 대담을 시작한 이 전 장관은 "제 인생의 첫 번째 책은 돌상에서 집은 책이었고, 늘 책을 읽어주신 어머니가 바로 두 번째 책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단순히 종이책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 전자책은 진정한 의미의 전자책이 아니라면서 어린 시절 책을 읽어주셨던 어머니처럼 육체와 감성이 있는 디지털 책이 반드시 만들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전 장관은 또 "진짜 책과의 만남은 불행하게도 일제강점기 학교에서 배운 일본말로 된 교과서였다"고 했다.
그는 "학교에서 '아이구머니'라고 말하면 한국말을 쓴다고 벌을 받았다"면서 "일본인들이 이런 것(한국인이 일제강점기에 겪은 고난)을 알면 한국과 일본이 같은 집단 기억을 함께 가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역사를 바꿀 순 없지만 책은 한 시대의 집단기억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히틀러를 모르는 독일의 젊은이들이 히틀러를 숭배하자 독일이 홀로코스트 책과 영화를 만들어 나치에 대한 집단기억을 새롭게 환기시켜 프랑스와 역사 화해를 이룬 것처럼 한국과 일본도 집단기억을 공유할 때 미래의 세대가 과거의 역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2013/07/04 19:20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