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명왕성' 연출..입시 지옥의 살풍경 그려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치열한 경쟁사회잖아요. 그냥 경쟁도 아니고 무한으로 경쟁을 강요하는. 고등학생들만의 얘긴 아니죠.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 전체의 이야기입니다."
영화 '명왕성'은 어느 입시 명문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다. 학생들이 모두 기숙사에서 살며 밤을 새워 공부하고 시험을 보면 등수를 순서대로 적은 종이가 학교 한가운데에 붙는다. 전교 1등에서 10등까지 따로 모아놓은 특수반에서는 등수가 밀린 아이들을 가차없이 내쫓는다. 이런 풍경 자체도 살벌하지만, 그 안에서 점점 괴물이 되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은 더 끔찍하다.
이 영화를 만든 신수원 감독은 10여 년간 중학교에서 사회교사로 일한 경력이 있다. 안정된 교사 생활을 버리고 꿈을 찾아 늦깎이로 영화를 공부하고 감독이 됐다. 데뷔를 준비하며 여러 편의 시나리오를 썼고 첫 장편 '레인보우'(2010)로 데뷔의 꿈을 이뤘지만, 그의 머릿속에서 늘 떠나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가 몸담았던 학교 얘기였다. 아이들의 모든 생활이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으로 황폐해지는 풍경을 직접 목도했기 때문이다.
영화 개봉(11일)을 앞두고 지난 1일 삼청동에서 그를 만났다.
"자꾸 이 이야기('명왕성')에 마음이 가더라고요. 오랫동안 염두에 둬 왔던 얘기이고 생각날 때마다 촘촘히 메모해온 내용이 있었거든요."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하지만, 단순한 학원물로 만들 생각은 없었다고 했다. 아이들끼리 투닥거리고 끝나는 얘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현실을 축소판으로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
"고등학생들이 장난치고 까불고 공부하는 일상을 담을 수도 있었는데, 그런 영화를 만들 생각은 아예 없었어요. 전면적으로 이 사회를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학교에서 출발하지만 여기서 공포를 느끼는 건 아이들의 현재 지위가 평생 쭉 간다는 것이거든요. 특히 몇 년 전부터 자립형사립고니 외고니 생기면서 초등학교 때부터 거길 보내려고 애쓰는 모습들을 봤고 참 무섭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입시 제도와 경쟁 구도 안에서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도록 길러진 아이들이 그대로 어른이 됐을 때 벌어질 풍경이 무섭다고 그는 탄식했다.
"그 안에서도 현명하게 자란 아이가 있겠지만 안 그런 아이들도 있겠죠. 그런 아이들의 단면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들이 자라나서 이끄는 세상이 진짜 끔찍한 세상이 될 것 같다는 공포를 극단적으로 표현했어요. 그래서 '명왕성'은 어떻게 보면 공포영화죠, 귀신만 안 나올 뿐이지."
교사 생활의 경험에 더해 시나리오를 준비하며 여러 고등학생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신문기사를 모으는 등 취재도 많이 했다고.
"1등부터 10등까지 모아놓는 '진학재'는 어떤 학교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에요. 열 명을 선발해서 한 교실에 넣어놓고 등수대로 앉힌 뒤에 다음 시험에서 10등 안에 못 들면 퇴출한다는 거죠. 그 얘길 듣고 '와! 미쳤구나, 드디어'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 얘길 듣고 시놉시스를 쓰기 시작했죠. 그런데 거기만 그런 게 아니더라고요. 외고 안에 또 유학반이 있고 서울대진학반이 따로 있다는 거예요. 기숙사에서 밤에 소등이 된 뒤에 애들이 의자를 갖고 나가 복도에서 공부하는 풍경도 실제로 들은 얘기예요. 요즘 강남엔 정신병원에 왔다갔다하는 애들이 늘어난다는 기사를 본 적도 있고요. 이런 환경에서 애들이 자살 시도를 못 할 뿐이지 사실 그런 심정을 가진 거죠."
영화는 미스터리 스릴러의 장르적 성격을 띠고 있다. 전교 1등으로 군림하던 우등생 '유진'(성준 분)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하고 열등생인 '준'(이다윗)이 용의자로 몰리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사건을 둘러싼 진실이 하나둘씩 밝혀지는 흐름이다.
영화에서 특히 눈에 띄는 인물은 가해자이자 피해자로 등장하는 입체적인 캐릭터 '유진'이다.
"유진은 그 그룹의 다른 애들처럼 죄의식 없이 계속 갈 수도 있는 아이였어요. 그렇게 길들었으니까요. 누군가 자기 영역을 침범했을 때 기대는 게 폭력이고. 유진도 그렇게 될 수 있는 아이였는데, 뭔가 균열이 생긴 거죠. 완벽할 수 있는 기득권의 아이인데, 틈이 생겼을 때 과연 버틸 수 있겠나 싶었어요. 뭘 할 수 있겠어요. 그것만 보고 자란 아이인데. 입시병기로 자라난 아이들은 다른 상황에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반쪽 세상만 보고 자란 아이들이니까요. 거기서 능력이 없으니까 죽음 아니면 도태되는 길밖에 선택할 수 없죠."
이번 영화는 청소년 문제를 다룬 영화인데도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을 받아 논란이 되기도 했다. 몇몇 장면에 폭력성이 있다는 이유였지만, 감독은 아이들이 놓인 현실이 훨씬 더 폭력적이라고 꼬집는다. 때려 부수고 사람을 죽이는 등 폭력 장면이 많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대부분이 15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는 데 비하면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는 문제제기가 영화계 안팎에서 거세게 일었다. 영화는 결국 재분류에서 15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았다.
"이 영화를 아이들이 본다면 '저런 괴물은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그걸 모방할 수 있다고 보는 것 자체가 아이들을 인격체로 보는 게 아니라 가르치는 대상으로 보는 사람들의 편견인 거죠."
그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을 졸업하고 첫 장편 '레인보우'(2010)로 도쿄국제영화제에서 아시아영화상을, 단편 '순환선'으로 지난해 칸국제영화제에서 비평가들이 주는 카날플러스상을 받았다. 두 번째 장편인 '명왕성'은 올해 초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제너레이션 14플러스(14세 이상 관람가) 부문에 초청돼 심사위원 특별언급상을 받기도 했다.
영화를 만들 때마다 해외에서 상을 받아오는 이 감독의 다음 작품은 뭘까 궁금하다.
"일단 '명왕성'으로 오래 하고 싶었던 이야길 해서 후련해요. 더 하고 싶은 게 또 있을까 하는 허탈함까지 있을 정도로요. 그런 게 또 생기겠지만 시간이 필요하겠죠."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2013/07/02 10: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