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니버스극 '14人(in) 체홉' 출연..'백조의 노래' 주역
(서울=연합뉴스) 서혜림 기자 = 어두컴컴한 무대 한쪽에서 한 노인이 어슬렁어슬렁 걸어나온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얼굴은 술로 발갛게 물든 노배우 '바실리 바실리치'다.
공연 후 분장실에서 잠깐 잠든 사이,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없다. 불이 다 꺼진 극장. 이곳에 남아 어둠을 견디는 이 퇴물 배우는 말한다.
"나이 일흔이면 다른 사람들은 새벽예배를 다니고 죽음을 준비하는데, 나는……. 아아! 욕지거리에, 술 취한 면상에, 이런 어릿광대 옷이라니……."
안톤 체호프의 단막극 '백조의 노래'는 퇴락한 노배우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50년 동안 무대에서 늙어간 이 연극배우는 영광스런 박수갈채를 추억하기도, 아픈 사랑을 떠올리기도, 보잘것없는 현재의 모습을 탓하기도 하며 밤을 지새운다.
이 극에 힘을 불어넣는 주인공은 연극배우 박정자(71)다.
바실리 바실리치와 일체가 된 듯한 이 배우의 음성과 몸짓은 25분짜리 짧은 무대에 긴 여운을 남긴다.
최근 공연이 개막한 극장 프로젝트박스 시야에서 그를 만났다.
예순아홉의 노배우 '바실리 바실리치'가 하는 대사는 곧 그의 말이기도 하다고 했다.
"나는 관객을 믿지 않는다는 대사에 깊이 공감합니다. 조금은 슬픈 일이지만, 관객은 극장을 나서면 자신의 어릿광대를 잊어버리죠. 체호프는 그걸 알았던 겁니다. 배우는 노예에 불과하며, 다른 사람의 노리개, 광대, 익살꾼이라는 것. 사람들은 자기들 허영심 때문에 친분을 맺으려 하지만, 배우에게 자기 여동생이나 딸을 줄 정도로 자신을 비하하지는 않는다는 것. 그러니 배우는 관객의 박수도, 화환도, 열광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거죠."
이상한 일이다. 관객과 함께한 50년의 세월 동안 그가 느낀 게 그들에 대한 '불신'이자 '배신감'이라니.
그러나 그는 이러한 감정은 불완전한 인간의 만남에서 필연적이라고 했다.
"사람은 본래 속물적인 존재인 거니까. 열렬한 박수갈채를 보내다가도, 쉽게 무대를 외면해 버리는 게 관객인 거죠. 극 중 대사가 관객에게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뭐 저는 아닌가요. 저도 꽤 속물적인 인간이거든요. 우리의 그런 불완전함에 대해 얘기하는 겁니다."
'백조의 노래' 무대에 선 박정자 노배우 바실리 바실리치(박정자)와 프롬프터 니끼따 이바늬치(박상종)의 모습 (사진제공:연극열전) |
곳곳에서 묻어나는 촌철살인의 대사도 그렇지만, 박정자 특유의 깊고 또렷한 중저음의 목소리도 무대를 특별하게 만드는 힘이다.
그리스 비극이나 셰익스피어의 작품 등 문학성이 강한 고전에 어울리는 그의 톤은 바실리 바실리치가 '햄릿', '리어왕', '오셀로'의 대목을 외쳐 보일 때 특히 빛을 발한다.
고전 희곡 연출에 강한 한태숙 연출가가 "'리처드 3세'의 주인공으로도 손색없다"고 했을 정도로 안정적인 연기를 선보여온 그다.
하지만 늘 비슷한 배역에 같은 톤으로 하는 연기는 지양한다고 했다.
"어떤 역할이든 표현할 수 있는 그릇을 다양하게 가지고 있어야 해요. 남자든 여자든 가릴 것 없이 맡은 역할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어야죠."
배우 박정자 (사진제공:연극열전) |
'오이디푸스'의 남성 예언자 테레시아스에서 러시아 남자 노배우 '바실리 바실리치'까지 성을 넘나드는 연기를 보여준 그는 이제 노처녀 역할에 탐을 냈다.
심약한 젊은이가 혼기를 놓친 노처녀에게 청혼하던 날 벌어지는 해프닝을 그린 체호프의 또 다른 단막 희곡 '청혼'의 주인공 말이다.
"노처녀 역할을 저처럼 나이 든 사람이 능글맞게 하면 더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 오랜 시간 연기를 해오면서도 고루한 느낌 없이 자유롭게 무대를 누빈 그는 올 하반기에도 바쁘게 극장을 오갈 예정이다.
지난 4월 서울에서 선보인 '안티고네'의 지역 공연이 시작됐고, 무대 미술가 이병복 씨가 남편 고(故) 권옥연 화백과 함께 꾸린 무의자 박물관에서 하반기에 작품을 올릴 계획이기도 하다.
"날 더러 이제 좀 쉬면서 하시라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때마다 절레절레 고개를 젓죠. 죽으면 쉴 텐데, 벌써 그만할 필요가 있겠어요? (웃음)"
▲연극 '14人(in) 체홉' = '백조의 노래'를 포함한 체호프의 단막 희곡 4편과 단편소설 1편을 세 편씩 번갈아 엮어 올리는 옴니버스 형식의 공연. 7월7일까지 프로젝트박스 시야에서. ☎1544-1555.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2013/06/23 10:44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