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인물로 '피아니스트' 등장시켜
라이브 연주와 좋은 연기가 여운 남겨
(서울=연합뉴스) 강일중 객원기자 = 술병을 들고 무대에 들어서는 피아니스트. 그는 환영(幻影)을 본다. 자신의 콘서트 객석을 꽉 메운 관객들. 관객을 향해 정중히 인사를 마친 그는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라흐마니노프를 친다. 연주가 끝나기가 무섭게 우레와 같이 터지는 환호와 박수. 환청이다. 그 소리를 뒤로하고 쓸쓸한 모습으로 극장을 떠나는 피아니스트.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무대 위에 오른 연극 '벚나무 그늘 아래에서 벌어지는 한 가문의 몰락사'의 맨 처음과 끝 장면이다. 체호프의 희곡 '벚꽃동산'을 재구성해 이런 장면 구조로 풀어낸 것이다. 극의 중간에는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소나타 37번이 등장인물 각자가 느끼는 아스라한 슬픔과 외로움을 머금은 듯한 소리로 울려 퍼진다. 무대 뒤 높은 단 위에 앉은 피아니스트 역 공양제 음악감독의 연주다.
많은 극단이 자주 '벚꽃동산'을 다양한 방식으로 무대에 올리고 있는 가운데 '벚나무 그늘 아래…'는 피아니스트라는 새로운 인물의 설정과 라이브 피아노 연주를 통해 인물과 장면 구조상의 진부함을 피해 나간다. 극의 흐름 속에 공양제의 피아노 연주를 듣는 맛이 쏠쏠하다.
체호프 작품의 일반적인 특징은 지친 삶의 일상을 특별한 큰 사건 없이 잔잔하게 그린다는 점. 또 대체로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가운데 그들 하나하나가 저마다 아픔을 갖고 있다. 그래서 관객들은 주역이건 조역이건 여러 등장인물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거기서 위로를 받으며 삶에 대한 희망을 갖는다. 체호프 작품이 주는 매력이다.
'벚나무 그늘 아래…'도 큰 틀에서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내용도 같다. 벚나무 동산 주인 류보비가 파리에서 돌아오고, 그녀에게 신흥부자가 된 농노의 아들 로빠힌은 벚나무 동산을 별장 부동산으로 개발해야 한다고 권한다. 옛 영화에만 젖어 현실감각이 부족한 류보비는 그 말을 새겨듣지 않는다. 결국 벚나무 동산은 로빠힌 차지가 되고 류보비는 다시 쓸쓸하게 파리로 떠난다. '벚나무 그늘 아래…'는 재구성 과정에서 영화 뒤에는 몰락의 날이 오며, 겨울이 지나면 다시 올 봄을 그릴 수 있다는 희망이 더욱 부각되도록 만들어졌다.
극 중 피아니스트는 연주가로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시절에서 비켜나 있다. 어느 날 술에 취한 채 먼지 덮인 옛 카페에 들어서 과거를 회상하며 떠오르는 악상으로 차이콥스키를 친다. 그의 모습은 '벚나무 그늘 아래…'의 주인공 이미지와 중첩된다. 차이콥스키와 라흐마니노프는 체호프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러시아 예술가들로 그들의 음악은 극의 분위기 속에 아름답게 녹아든다.
출연진의 연기에서는 진정성과 열정이 엿보인다. 자신의 몰락을 애써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류보비 역의 조은경 배우는 중심인물로서의 역할만큼 출연진 전체의 무게 중심을 잡는다. 몰락해 가면서도 여전히 철없이 돈을 낭비하는가 하면 좌절감 속에서도 삶의 의지를 드러내는 류보비 역을 다양한 표정과 몸짓을 구사하며 잘 풀어낸다. 류보비의 수양딸로 궁색한 가운데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며 끝내 신흥부자 로빠힌과의 결혼을 이뤄내지 못하는 바랴 역의 이경성, 집안을 재정적으로 다시 세워보려 하나 역부족으로 마음 아파하는 외삼촌 가예프 역의 김성일 등 중견배우들 연기 역시 안정적이다.
작품 출연진 16명은 모두 창작공동체 아르케 소속 단원들. 상대적으로 젊은 배우들의 연기력도 돋보인다. 특히 자신의 진보적인 의식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만년 대학생 뻬쨔 역의 서삼석 배우, 류보비 집안의 충실한 하인으로 몰락의 현장을 끝까지 지키는 피르스 역의 김관장 배우 연기는 어설픈듯하면서도 인상적이었다.
연회 장면에서 이뤄진 출연진의 합창과 춤, 그리고 샤를라따 역 한보람 배우의 마술 묘기도 좋은 볼거리다. 무대 왼쪽 뒤의 막에 비치는 벚나무 동산의 그림자, 또 마지막 부분에 벚나무를 도끼로 찍는 음향, 하인 피르스의 죽음 후 공양제가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의 프렐류드 등이 진한 여운을 남긴다.
맨 왼쪽이 하인 피르스 역의 김관장 배우, 맨 오른쪽은 뻬짜 역의 서삼석 배우.
(사진=강일중) |
◇ 연극 '벚나무 그늘 아래에서 벌어지는 한 가문의 몰락사' = 창작공동체 아르케(대표 김승철) 제작. 한국공연예술센터 공공지원 시리즈.
만든 사람들은 ▲원작 안톤 체호프 ▲재구성 및 연출 김승철 ▲드라마터그 배선애 ▲무대 박찬호 ▲조명 김창기 ▲의상 최윤희 ▲분장 장경숙 ▲음악 공양제 ▲음향 이장욱 ▲안무 김주희 ▲마술 송다민 ▲조연출 마희선.
출연진은 공양제(피아니스트)·조은경·김성일·이경성·박시내·이형주·서삼석·한보람·서왕석·김관장·박상석·최문정·김민태·유지혁·이진복·한아름.
공연은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오는 30일까지.
공연문의는 ☎070-7869-2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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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2013/06/22 21:47 송고